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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50년 전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는 내 가슴에 하얀 옥양목 손수건을 접어서 핀으로 달아주었다. 이제 학생이 되었으니 코를 소맷부리로 닦지 말고 손수건으로 닦으라는 뜻이었다. 학교에 가보니 다른 아이들도 다 이름표와 함께 손수건을 그렇게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런 전통은 몇십 년 후 내가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낼 때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내려왔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달라져 아동복도 모양과 질이 수많은 변천을 거쳤건만 국민학교 신입생의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다는 풍습만은 변함이 없었다. 새 옷을 못 사 입히는 집일수록 손수건만이라도 눈에 띄게 희고 구김살 없는 것으로 달아주려고 애썼다. 그렇게 어머니들이 정성을 기울이던 국민학교 신입생의 표시가 어느 틈에 없어지고 만 것일까 — [박완서]없어진 코흘리개 #초등학교 #입학식 [A] 통학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 동네 학군의 학교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시궁창을 겸한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곤두선 듯 경사가 급한 층층다리를 지나서 전찻길을 건너야 하는 위험부담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왕산 넘어 사직동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지만 평탄한 외길이었다. 엄마도 나도 시골뜨기답게 산길을 혼자 넘어 통학한다는 걸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 [박완서]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초등학교 #통학 [A] 공부도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중략] 나만의 등굣길은 고독했지만 모범생 아니면 될 수 없는 기대를 걸머진 열등생이 일탈할 수 있는 유일한 샛길이었다.— [박완서]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초등학교 #통학 [A] 그때는 서울을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으로 나누어 문안, 문밖이라 부르며, 집값의 격차로부터 갖가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가뜩이나 어리둥절한데 두 가지 주소를 외워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물어보면 대답할 주소와 길에서 혹시 집을 잃어버리면 대답할 진짜 주소와. 그것은 나이 어린 시골뜨기 계집애에겐 적지 아니 고통스러운 부담이었다. 엄마는 늘 그 둘을 행여나 헷갈리는 일이 있으면 큰일난다고 일러줬고, 그럴수록 나는 꼭 그걸 헷갈리고 말 것 같아 겁이 났고 동네서고 학교서고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 서울 애들은 영원히 저희 끼리끼리만 놀지 나 같은 건 붙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죽고 싶도록 절망적인 것이었다. — [박완서]도시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학교생활 — [A] 입학하자 며칠 후부터 시작된 가정방문 때만 해도 그랬다. 어머니는 어떡하든 입학시험을 위해 속인 가짜 주소에서 선생님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소를 빌려준 친척 댁에 양해를 구해 그날 하루 어머니가 그 집주인 노릇을 하기로 했다. 거짓말은 애당초 시키기가 잘못이었다. 일은 점점 더 복잡하게 했다. 먼 친척이어서 나는 그 집을 별로 가본 일이 없었고 그 집은 꼬불꼬불 복잡한 골목 속에 있었고 나는 촌 계집애답게 길눈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연 사흘을 학교에서 그 집까지 가는 연습을 나에게 시켜주셨다. 나는 그 친척 댁의 사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전형적인 서울의 중류 생활양식을 볼 수가 있었다. 골목이 좁고 기와집이었으나 지붕이 낮고 행랑채와 안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문간에서 볼 수 있는 행랑방은 더럽고 냄새나고 누덕누덕 기운 이부자리가 낮에도 펴 있었고 그 속에선 행랑아범이 코를 골고 있었다. 행랑어멈은 늘 바지런하게 공처럼 굴러다니면서 주인집 아이들을 작은아씨 아니면 도련님으로 불렀고 어른은 나으리, 마님, 아씨로 부르면서 얼굴엔 늘상 비굴한 아부의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울서 못사는 사람이 시골서 못사는 사람보다 훨씬 천격스러워 보였다. 행랑어멈의 여러 아이들이 흰 밥풀은 하나도 안 섞인 샛노란 조밥을 아귀아귀 먹는 모습은 숫제 무서웠다. 안채는 바깥채에서 댓돌을 두 단쯤 더 올라간 곳에 있었고 마루는 새까맣고도 반들반들했고 찬장도 뒤주도 반들반들했다. 장독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독들도 반들반들했고 학과 사슴과 거북이 입에 불로초를 물고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그림이 있는 화초담은 보기 좋았다. 안방은 대낮에도 침침했고 머리를 곱게 쪽찌고 안경을 쓴 친척 할머니는 언제나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눈은 섬찟하도록 차가왔다. — [박완서]서울 친척 #초등학교 #1학년 #가정방문 [B] 초여름에 가정방문이 있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완벽한 정직을 요구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정직 교육에 가장 역점을 두는 듯했다. 수신 교과서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천황에 대한 충성 다음이 정직이었다. 거짓말을 시킨 아이가 선생님에게 가장 큰 수모를 받았다. 물건이나 돈을 주웠을 때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학교 밖에서는 파출소에 갖다주어야 한다는 것도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떨어진 물건을 보고도 못 본 척해라. 줍긴 왜 주워. 떨어트린 사람은 되짚어 오게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찾아가게 그냥 놔두면 될걸. 잘난 척하고 싶은 사람이나 파출소나 선생님한테 갖다 바치는 거란다.” 아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주인이 찾으러 오기 전에 딴 사람이 집어 가면 어떻게 하냐고 당연한 걱정을 하면, 엄마는 그건 남의 것 가져가는 사람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상관할 거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엄마가 꿈꾼 건 황금 보따리를 떨어트렸다가도 제자리에서 도로 찾을 수 있는 이상 사회였을까 아니면 선행의 이기주의였을까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직의 완벽주의가 거짓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려는 게 문제였다. 엄마는 내 기류계를 가짜로 옮겨 원하는 학교에 집어넣었으면 그만이지, 그걸 가정방문 때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아마 중간에라도 탄로가 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촌사람다운 고지식한 우려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나는 엄마의 그런 이중성에 맞장구치기가 지겨웠다. 그만하고 싶었다. 엄마는 학교생활에 대해 뭘 너무 모르면서 그날 하루만 때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직동 방면을 도는 날은 미리 정해졌기 때문에 엄마는 그날만 그 집 안주인 노릇을 하기로 친척 집의 양해를 구했다. 그날은 사직동 방면 아이들만 교실에 남아 있다가 선생님하고 같이 하교를 했다. 그 애들은 이웃해 살거나 등하굣길에 만나는 아이들이라 서로 누구 집이 어디라는 것도 대강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순서로 순번을 짜는데 나는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처졌다. 교실에서도 존재 없는 아이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떤 아이가 쟤는 우리 동네서 처음 보는 아이라고 하자, 딴 아이들도 그래그래 하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흘끗거렸다. 그 아이들과는 딴판인 내 촌스러운 복장이 그 말 한마디로 이단시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재빨리 시골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거라고 꾸며 댔다. 그 고비는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맨 나중까지 남은 애가 우리 친척 집 바로 이웃이었다. 그 애는 영악하고 상냥하게 생긴 애였는데 내일서부터 학교 갈 때 서로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안 돼, 우린 내일모레 또 이사 갈 거야.”라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덧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친척 집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 선생님을 맞았고 행랑어멈이 화채를 은빛으로 닦은 놋쟁반에다 받쳐 내왔다. 그날을 무사히 넘긴 엄마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친척 집 옆에 산다는 아이는 나에게 오랫동안 화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애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그 애가 시키는 심부름은 뭐든지 했다. 고무줄을 나더러는 잡고만 있게 하고 혼자서만 깡충깡충 뛰어넘는 건 약과였다. 신을 괜히 벗어 던지고 나보고 주워 오라고 명령하면 별수 없이 주워 왔다. 그 애는 그걸 즐겼고 아이들 사이에선 내가 그 애의 꼬붕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 애가 정말 내가 주소를 속인 걸 큰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군림한 건지, 내 자격지심으로 괜히 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애한테 만만하게 보인 건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 사회에서 그런 주종 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걸 뒤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는 학교생활이 지옥 같았고, 집에 와도 심심해서 몸이 비비 꼬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연히 우리 동네 학교 다니는 아이들끼리만 몰려다녔다. 산까지 넘어 문안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중뿔난 시골뜨기를 이단시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가정방문 [C] 일 학년 담임선생은 내가 처음 만난 엄마가 말한 신여성의 구색을 한몸에 갖춘 분이었다. 머리를 반가리마를 타서 뒤에서 히사시까미로 빗어 올리고 흰 하부다이 저고리에 검정 지리면 통치마를 입고 까만 뾰족구두를 신었다. 출퇴근 때는 까만 핸드백을 들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이치를 모르는 거 없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우리들이 물어보는 아무리 어려운 질문도 한 번도 못 대답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뭐든지 알고 있을뿐더러 누구든지 사랑했다. 약간 주근깨가 있는 화장 안한 수수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선생님 둘레엔 항상 많은 아이들이 따랐다. 운동장에서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걸음도 제대로 못 옮기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는 햇병아리를 거느린 암탉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멀찌감치서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손톱을 질겅질겅 씹었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등교나 하교시간에도 손톱을 씹었기 때문에 엄마가 따로 깎아줄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선생님 손을 잡아보고 싶어했다. 선생님 손은 누구든지 잡고 싶어하고 갖으면 놓지 않는데 선생님 손은 둘 뿐이니까, 아이들을 어디까지나 고루 사랑하는 선생님은 번갈아 잡아주려고 애썼다. 자아, 아직도 선생님 손 못 잡아 본 사람 손 들어요. 그럼, 나요나요 하고 아이들이 손을 들면 선생님은 그 중에서 영낙 없이 정말 못 잡아 본 애 손만 가려내서 꼭 쥐어주기도 하고 쓱쓱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손톱을 씹으면 씹었지 손을 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고루 사랑할 것 같은 선생님 특유의 상냥한 미소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단언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1학년 #가정방문 [A] 엄마 손 잡고 첫 등교하던 날 나는 나의 촌스러움보다는 어머니의 초라함이 남부끄러워서 엄마의 손을 얼마나 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 이미 신식 엄마들은 쪽 같은 거 찌지 않았고 파마나 트레머리를 하고 있었고, 얼굴에 화장하고 옷도 고운 비단옷이었다. 쪽찌고 뻣뻣한 무명 치마저고리에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것도 창피한데 어머니는 일본말도 못했다. 당시에는 담임이 일본 사람이 아니라도 학부형을 상대로 꼭 일본말을 썼다. 심지어는 일대일로 말할 때도 통역을 가운데 놓고 말하는 조선인 선생도 있었다. 학년이 높아짐에 따라 같은 반 동무들이 통역을 맡게 됐지만 일본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학부모는 한 반에 몇 안 돼 나는 그게 여간 수치스럽지가 않았다. 제발 어머니가 학부형회에 참석을 안 해주길 바랐지만, 괜히 학교에 오신 적도 없었지만 학부형회가 있는데 빠지실 어머니도 아니었다. 시골서는 가장 유식해 보이던 어머니가 서울서는 글커녕 말도 안 통하는 무식쟁이 대접을 받는 것은 나로서는 여간 참아내기 힘들지가 않았다. —[박완서]나의 어머니 #초등학교 #1학년 #가독 #어머니 [A] 학부형회 날이 왔다. 1학년 첫 학부형회라 거의 모든 학부모님들이 모이셨다. 어머니하고 딸은 참으로 비슷비슷했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답게 촌스러웠고 그 아이 어머니는 그 아이 어머니답게 젊고 예쁘고 멋쟁이였다. 만약 그애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한 가지라도 나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애 엄마를 골라잡겠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의 촌스러움보다는 어머니의 촌스러움이 창피해서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학부형회가 끝난 다음 나는 그애한테 “느네 엄마 참 예쁘다”는 선망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애는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도리어 뾰로통하더니 한참 만에 자기 비밀을 하나 가르쳐줄 테니 절대로 반 아이들한테 풍기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제부터 들은 얘기를 아무한테도 말 않겠다는 맹세로 그애와 새끼손가락 걸기를 했다. 그애는 내 귀에다 대고 그 엄마는 의붓엄마고 친엄마는 나쁜 의붓엄마 때문에 쫓겨났다고 했다. 내가 아는 의붓엄마는 콩쥐팥쥐의 엄마, 장화홍련의 엄마가 전부였으므로 그애가 의붓엄마하고 살면서도 매도 안 맞고 예쁜 옷 입고 학교 다니는 게 암만해도 이상했다. 그애는 내가 믿지 않는 걸 알자 나쁜 의붓엄마라는 걸 어떻게든 나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그 의붓엄마가 바에서 술 따르던 여자였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그 말을 누구한테 풍기지 말라고 거듭거듭 다짐하고 안달을 했다. 나는 내가 안 한다고 한 말은 절대로 안 하는 신용 있는 아이라는 걸 그애한테 인식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나 역시 그애한테 나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거였다. 나도 그애와 마찬가지로 엄숙하게 새끼손가락 걸기를 하고 나서 내가 주소를 속이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과 나의 정말 주소는 고개 너머 현저동 감옥소가 있는 동네라는 고백을 했다. 그애는 나의 고백을 별로 탐탁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애가 탐탁해하지 않자 나는 내 비밀이 그애의 비밀만 못한 것 같아 무안했다. 그러나 그애는 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다. 내가 감옥소 동네 아이란 소문이 확 퍼졌다. 나는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차라리 선생님이 나를 내쫓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났다. 당시의 학구제란 시험 때만 잠시 유용한 거였다. 그때 일이 나에게 어떤 계기가 됐다면, 그건 내가 다시는 그애의 ‘꼬붕’ 노릇을 안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애를 그때부터 경멸했기 때문이다. — [박완서]서울 아이 #초등학교 #1학년 #친구 [A] 그때는 서울을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으로 나누어 문안, 문밖이라 부르며, 집값의 격차로부터 갖가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가뜩이나 어리둥절한데 두 가지 주소를 외워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물어보면 대답할 주소와 길에서 혹시 집을 잃어버리면 대답할 진짜 주소와. 그것은 나이 어린 시골뜨기 계집애에겐 적지 아니 고통스러운 부담이었다. 엄마는 늘 그 둘을 행여나 헷갈리는 일이 있으면 큰일난다고 일러줬고, 그럴수록 나는 꼭 그걸 헷갈리고 말 것 같아 겁이 났고 동네서고 학교서고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 서울 애들은 영원히 저희 끼리끼리만 놀지 나 같은 건 붙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죽고 싶도록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에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것도 아주 예쁘고 똑똑해서 선생님이 귀여워하고 교단에 올라가서 봄이 왔다는 일본 노래를 독창까지 한 애가 내 친구가 돼주었다. 걔는 내 짝이었는데 고무나 연필을 교실 바닥에 떨어뜨리면 나더러 주워달래고, 걸상을 책상 위에 얹는 일도 나더러 해달랬고, 나는 걔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다. 반 애들이 내가 걔 ‘꼬붕’이라고 했지만, 나는 꼬붕의 뜻을 잘 몰라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운동화를 한 짝 벗어서 한 발로 오랏말처럼 저만치 차 던지고 주워오라고도 했다. 아무리 시골뜨기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어서 시무룩하게 있으면 운동화가 없는 한쪽 발을 쳐들고 한 발만 갖고 깽깽발을 치면서,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하며 엄살을 떨면 집어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앙증맞고 깨끗한 도시 아이의 흰 양말에 흙이 묻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내 심정은 예쁜 인형을 아끼는 마음과도 비슷했지만 비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쁜 애는 친절하게 소근소근 속삭여서 재미있는 얘기를 할 적도 많았다. 한번은 학부형회가 있었던 날인데,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답게 제일 촌스러웠고 걔 엄마는 걔 엄마답게 예뻤다. 놀라운 것은 너무도 젊은 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느네 엄마는 참 예쁘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느네 엄마를 닮았냐”고 했다. 그러나 그애는 좋아하지 않고 이상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더니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무슨 말 하나 해줄게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했다. 나는 가슴을 다 두근대면서 절대로 말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래도 그애는 못 믿겠다는 듯이 내 새끼손가락과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면서 종알종알 주문 같은 걸었다. 주문이라야 별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 사회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이 약속을 안 지키면 무슨무슨 벌을 받는다는 기괴하고도 황당한 것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상당히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엄숙하게 다시 한번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고 맹세를 했다. 그제야 그 아이는 입을 내 귀에다 대고, 저 여자는 자기 친엄마가 아닌 의붓엄마고 친엄마는 쫓겨났고 의붓엄마는 ‘빠아’에 다니던 나쁜 여자라고 했다. 나는 빠아가 뭐 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모르냐고 아주 나쁜 데라고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생전 처음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흐뭇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비밀을 통해 그 예쁜 애와 영원한 우정이라도 맺어진 것처럼 느꼈다. 실상 나는 그전까지는 그애가 나와 너무 맞지 않게 예쁘고 세련됐기 때문에 언제고 날 버리고 딴 애와 친해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빠아라는 데가 뭐 하는 덴지 그게 궁금해 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그 빠아라는 데 대해서 물어봤다. 엄마는 가르쳐주기는커녕 그런 못된 소리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야단야단치면서 그 소리를 들은 곳을 대라고 했다. 나는 그애와의 엄숙한 맹세를 생각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엄마는 나중엔 매까지 들면서 그 빠아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요즈음 상식으론 상상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땐 그랬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 비밀 때문에 매까지 맞고도 그애가 나에게만 그 비밀을 가르쳐줬다는 걸 감사했고 거기 무슨 보답을 하고 싶어했다. 마치 값진 선물을 받고 그것의 반값이라도 되는 걸로 보답을 하고 싶어 고민하는 만큼이나 진지하게 그 문제를 궁리했다. 마침내 나는 나도 그애에게 내 비밀을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내 비밀이란 다름이 아니라 주소가 두 개라는 거였다. 실제로 사는 주소를 속이고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가짜 주소를 썼다는 엄청난 비밀을 이 아이에게 고백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나한테 했던 것과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주문을 외고 나서 그애의 귀에다 대고 그 말을 했다. 말을 하고 나서 다시 한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만일 그 사실이 탄로가 나면 이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덧붙었다. 그러고 나니 빚이라도 갚은 것처럼 속이 후련할뿐더러 이제야말로 나와 그애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웬걸, 그 다음날로 내가 영천 사는 아이란 소문은 파다하게 펴졌다. 영천 사는 아이는 또 괜찮았다. 감옥소 동네에 사는 아이라는 거였다. 아이들이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악마처럼 악랄하고 잔혹한 데가 있다. 알라리 꼴라리 누구누구는 감옥소 동네에 산단다, 매일매일 전중이(죄수)만 보면서 산단다, 하고 반 아이들이 손뼉을 치면서 나를 놀렸다.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제일 큰 집이 죄인들을 가둬두는 데라는 건 알았지만, 그 동네 산다는 것까지 부끄러운 일이 된다는 건 처음 알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까지 내가 누상동이 아닌 영천에 산다는 걸 알게 되어 쫓겨나면 어쩌나 근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타격은 그 예쁜 애의 배신이었다. 손가락 걸기도, 맹세도, 주문도, 귓속말도, 어쩌면 그렇게 겁도 없이 외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배신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그때 학구제 위반으로 쫓겨나는 일도 안 당했고, 아이들의 놀림도 곧 가라앉았지만, 그때 그 얄쌍한 전형적인 서울 계집애의 배신이 안겨준 상처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것이었다. 나는 학교가 다니기 싫어서 차라리 쫓아내주었으면 싶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쫓아내길래 선생님께 우리집이 이 학교 관내가 아닌 영천이란 말씀까지 드렸다. 나로선 대단한 용기였다. 선생님은 그러냐고 말할 뿐 놀라지도 않았고 그후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 — [박완서]도시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친구 [A] 여름방학이고 겨울방학이고 방학만 했다 하면 그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개학 전날에나 올라오기를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했었다.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A] 해마다 두 차례 고향에서 긴 방학을 보낼 수 있을 때만 해도 고향이 없이 서울에서 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이 참 불쌍해 보였었다. 그애들도 똑같이 방학을 즐거워한다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방학이란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돌아갈 자연이 없는 순 서울 토박이 아이들이 긴긴 방학을 좁은 골목에서 기껏 고무줄이나 사방치기를 하며 보낼 생각을 하면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고, 내가 시골뜨기라는 데 행복감을 느꼈다. 실상 국민학교 때까지도 나는 시골뜨기 티를 못 벗어 종종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고 마음속 깊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열등감이 우월감이 될 수 있는 방학이 더욱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1930년대)만 해도 시골의 여자아이들은 거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릴 적부터 고된 가사노동을 익히게 했었다. 특히 농사일이 바쁜 여름철엔 계집애가 대여섯 살만 돼도 귀한 일손이었다. 다 해진 무명 띠로 동생을 온종일 업어줘야 하고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빨래도 해야 했다. 학교 갈 나이엔 벌써 밥을 지을 줄 알았고 치마 주름 정도는 달아 입을 줄도 알았다. 나는 서울서는 시골뜨기 티를 못 벗은 주제에 고향에 가서는 엉뚱하게도 서울서 신식 공부한 서울내기 티를 내지 못해했다. 그런 내가 얼마나 같잖아 보였던지 시골 아이들은 곧잘 나를 골탕 먹였다. 내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른 뱀을 왼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막대기로 때려잡아 막대기 끝에다 채찍처럼 휘휘 감아 보이기도 했고 즈네들은 먹는 버섯을 따면서도 나한테는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가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애들이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어내는 솜씨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서울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그런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그애들보다 내가 아는 게 더 많다는 같잖은 우월감 따위는 말끔히 가시고 그애들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르며 졸졸 따라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애들이 나와 함께 실컷 놀아준 것은 아니다. 낮 동안 그애들은 너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나는 걸리적대기만 했고, 나도 그게 얼마나 그애들한테 미안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집안에서 심심한 걸 참았다. 그러나 밤만 되면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웠다. 어른들은 멍석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세상 근심, 농사 근심, 동네 소문 등 시름에 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낮 동안의 고된 일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기력에 넘치는 기성을 지르며 떼를 지어 뛰어다녔다. 이 집 모깃불에서 저 집 모닥불로 매캐한 모깃불 연기를 부나비처럼 누비며 온 동네를 돌기도 하고, 냇물에 풍덩 뛰어들어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미역을 감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A] 밤만 되면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웠다. 어른들은 멍석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세상 근심, 농사 근심, 동네 소문 등 시름에 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낮 동안의 고된 일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기력에 넘치는 기성을 지르며 떼를 지어 뛰어다녔다. 이 집 모깃불에서 저 집 모닥불로 매캐한 모깃불 연기를 부나비처럼 누비며 온 동네를 돌기도 하고, 냇물에 풍덩 뛰어들어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미역을 감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동네 노인 중에는 옛날얘기 잘하는 노인도 있어 그런 노인은 아이들한테 인기였다. ‘할멈 할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단 방귀장수’ ‘잘생긴 신랑으로 변한 복숭아벌레’ 등이 다 그때 들은 옛날이야기다. 나는 이야기를 몹시 바치는 편이어서 집에서도 어머니나 할머니한테 졸라서 많은 옛날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여름밤 모깃불가에서 동네 노인들한테 들은 옛날얘기는 그보다 훨씬 구수하고 소박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옛날얘기가 문자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고대소설에 근거한 거라면 동네 노인의 옛날얘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면서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가미된 것이어서 훨씬 흥미 있고 자유분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귀신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는 질색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마지막 판에 가서는 꼭 무서운 이야기를 졸랐다. 처녀귀신, 총각귀신, 뒷간귀신, 달걀귀신 등 괴기한 귀신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오싹오싹하게 재미가 있었지만 그 이야기판이 우리집 마당이 아닐 경우 집에 돌아갈 일이 지레 겁이 나서 귀를 막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미 길엔 가로등이 있고 집은 다닥다닥 붙은 도시에 익숙해진 서울내기여서 시골 밤길이 싫고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나의 이런 도시적인 소심증을 시골 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길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속으로는 더욱 전전긍긍했다. 귀신 이야기를 실컷 듣고 나서 혼자 집에 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숨바꼭질을 하는 일이었다. 밤이 이슥해 모깃불도 사위어가고 어른들도 멍석에 네활개를 펴고 코를 골 무렵이면 아이들은 모깃불과 함께 흥이 사위어가는 걸 두려워하듯이 숨바꼭질 하자고 새로운 흥을 북돋았다. 시골의 여름밤은 으슥하고 캄캄한 구석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집집마다 가을에 비를 매려고 마당가에 둘러 심은 싸리나무만 해도 아이들 키가 넘었고 삼나무 밭은 서울내기의 어린 소견으로는 정글만큼이나 깊이 모를 미개지였다. 뒷간, 헛간, 외양간, 굴뚝 모퉁이, 장독대, 뒤란의 터줏자리 등 우리의 작은 몸을 숨길 데는 무궁무진했다. 물론 우리가 숨을 수 있는 한계는 미리 정해놓고 놀이를 시작했지만 누구네 집과 그 텃밭이란 한계가 서울내기의 좁은 소견으로는 황당하도록 넓게 느껴졌다. 불행히도 술래가 되어 감쪽같이 숨은 아이들을 찾아 으슥한 여름밤의 유난히 짙은 어둠이 고인 곳들을 하나하나 뒤질 때의 고독감을 무엇에 비길까. 옛날이야기 속의 귀신이 뒤쫓아오는 것 같아 제 발소리에 소스라치기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어둠도 사람을 감춘 어둠은 독특한 숨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죽자꾸나 자신의 소심증과 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여름밤의 숨바꼭질 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C] 여름방학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위해서 야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가 화신상회에 가서 예쁜 옷을 골라서 살 것처럼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대강 눈대중을 해다가 그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나를 전차를 태워서 서울 장안을 한 바퀴 돌렸고 처음으로 동물원 구경까지 시켜 주었다. 뭔가 한꺼번에 수용하긴 벅차고 고될 만큼 엄마는 나에게 대처라는 걸 대량으로 주입시키려 들었다. 현저동에 살면서 박적골의 근거를 가장 으뜸가는 품성으로 숭배하고 지킬 것을 강요했듯이 박적골로 돌아가려는 마당에선 대처 티를 무작정 날조하려 들었다. 엄마가 만든 원피스가 나에게 어울리는지 꼴불견인지 분간할 안목이 나에겐 없었다. 모시 두루마기도 그림같이 짓는 내 솜씨가 그까짓 내리닫이 못 지을까 하는 엄마의 장담은 감히 비평을 불허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내 옷차림을 흘긋 일별만 하시고도 곡마단에서 깡깽이 켜는 년 같군, 하는 혹평을 하셨다. 나는 그 옷을 다신 안 입고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다시 꺼내 입었다. 겨울방학 땐 엄마는 좀더 요란하게 나에게 서울티를 내주었다. 엄마는 친척집에서 토끼털 목도리와 스케이트를 얻어왔다. 토끼털 목도리는 목에만 두르면 그만이지만 스케이트는 한 번도 타본 일이 없는 걸 어깨에다 척 걸어 주면서 썰매 타지 말고 그걸 타고 놀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나는 스케이트를 남이 타는 걸 한두 번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황홀한 묘기였다. 나는 그런 묘기의 비결이 그 날 달린 구두에 전적으로 달린 줄 알았다. 사랑마당 앞엔 텃밭이 있었고, 텃밭 너머론 동구 밖으로 지나는 길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길 건너가 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선 마을 개구쟁이들이 신나게 썰매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 요술구두를 신고 자신 있게 그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했지만 웬걸, 몸의 중심도 못 잡은 데다가 가랑이는 양쪽으로 벌어져, 넘어지지나 않으려고 헛된 제자리 춤을 추는 게 고작이었다. 썰매를 타던 개구쟁이들이 이 신기한 구경을 하려고 내 주위로 미끄러져 왔다.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준 건 집의 머슴이었다. 머슴은 다짜고짜 나를 업더니 겅정겅정 집으로 뛰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사랑의 할아버지 방에다 내려놓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장죽이 내 정수리를 연타했다. 번쩍번쩍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요년, 요 고얀 년, 신식공분지 뭔지 시킨다길래 대처로 내놓았더니 기껏 배웠다는 게 덕물산(德物山) 무당의 작두춤이냐 뭐냐 허어 해괴한지고! 암만해도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계집앨 대처로 내놓았는가부다.” 나는 정수리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판국에도 웃음이 북받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별일이었다. 기껏 상상력의 한계가 덕물산 무당의 작두춤인 할아버지가 그렇게 우스웠다. 덕물산이란 송도에 있는 최영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 산으로 거기 무당의 작두춤은 유명했다. 그 이유는 지당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할아버지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불쌍하기도 했다. 나는 벌써 별의별 걸 다 배우고 다 구경했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적골을 천하 삼고 못 벗어나다가 돌아가시겠지 하는 처량한 생각은 어린 계집애에겐 가당치 않은 거였지만 대처 물 먹은 티이기도 했다.—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방학 [A] 1학년 때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방학은 즐겁지만 특히 겨울방학엔 설이 껴서 그 즐거움이 각별했다. 나는 방학하는 날 곧장 시골로 내려갔다. 기차 속에서 서울서만 사는 아이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방학을 할까를 심각하게 의심하기도 했었다. 우리 고향 개성의 설음식 중에선 특히 강정이 유명하다. 강정 중에도 얄팍하게 밀어서 마름모로 썬 깨강정, 흑임자강정과 악간 도톰하지만 맛이 뛰어난 땅콩강정은 어린 눈에도 도시의 어떤 음식보다도 깔끔하고 세련돼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우리 선생님 좀 갖다드리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좋은 음식 보고 선생님 생각을 하는 나를 들입다 칭찬하시고 예쁜 동고리짝에다 강정을 수북이 담아주셨다. 그러나 개학날 그걸 가지고 학교까지 가긴 갔는데 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때까지도 그만한 숫기가 없었고, 막상 선생님을 뵈니 그런 시골 음식을 잡수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도로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고 생각다못해 하굣길에 사직 공원에서 아이들한테 풀어 먹이고 말았다. — [박완서]서울내기 시골뜨기 2 #초등학교 #1학년 #방학 #박적골 [C] 그 해 겨울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올 땐 할머니가 특별히 정성들여 만드신 깨강정하고 땅콩강정을 싸주시면서 담임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하셨다. 그걸 다시 서울서 엄마가 예쁜 상자에 담아서 보자기에 싸주셨지만 나는 그걸 선생님께 갖다드리지 않았다. 그 사이 조금씩 사귄 친구들을 사직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나눠 먹어버리고 말았다. 골고루 다 귀여워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기 반에 한 번도 자기 손을 못 잡아본 애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선생님의 위선을 복수한 맛이 깨강정 맛보다 더 고소하고 달콤했으나 깨강정에는 없는 씁쓸한 뒷맛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1학년 #방학
[A]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건 일제시대지만 3학년까지는 그래도 조선어 교과서가 있었다. 2학년 교과서인지 3학년 교과서인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제1과에 먼 산에 아지랑이가 아물아물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듣기가 좋았는지 맛있는 음식처럼 입속에서 몇 번이고 굴려보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경이롭게 와닿은 최초의 문구였다. — [박완서]아지랑이 아물아물
[A] 나는 지금까지 국민학교 동창 중에선 J라는 그 아이 말고는 생각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을 만큼 그 아이한테만 빠져서 지냈다. J가 전학해 오고부터 나의 국민학교 생활은 비로소 밝고 활기찬 것이 되었다. J는 또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워낙 읽을 만한 책이 귀할 때라 동화책 말고도 읽을거리만 있다 하면 학교까지 가지고 와서 읽고는 나한테로 넘겨주었다. 나는 그애를 통해서 교과서 외의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좋은 책에의 갈증도 알게 되었다. 또한 책에의 갈증을 한껏 풀 수 있게 해준 것도 J였다. 5학년 때였다. J는 나에게 도서관에 가면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지금의 조선호텔 건너 쪽이 그때(일제시대)의 시립도서관이었는데, 중학생 이상의 어른들이 들어가는 열람실 말고, 별관에 아동들을 위한 개가식 도서관이 있었다. J가 그걸 알아봤고 그때의 우리들에겐 온갖 동화책이 고루 구비된 그곳은 알리바바의 동굴보다 더 눈부시고 신비한 보고였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보통 두세 권의 책을 독파했고 눈이 피곤해 창밖을 내다보면 늠름한 은행나무의 거목들이 철따라 아름다웠다. J와 나는 그 그늘에서 방금 읽은 책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가. 완전하고 행복한 공감으로 어린 가슴은 동기간 같은 우애와 충일을 맛보았다. 그러나 나의 편협한 소견 때문에 J와 나의 우정은 잠깐 끊기게 됐다. 중학교에 갈 때 J는 경기를 지망하고 나는 숙명을 지망했다. 그때만 해도 숙명은 지방에 많이 알려진 명문이어서 우리 어머니는 나를 데려다 서울의 국민학교에 넣을 때부터 이 아이는 장차 숙명학교에 갈 애로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딴 학교에 대해선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딴 학교에 못 가게 이미 운명 지워졌지만 J는 자유롭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가는 학교를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J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면담한 끝에 경기에 응시하기로 정했고, 우리는 둘 다 합격을 했다. 그애가 경기에 갈 때부터 섭섭했던 나는 합격을 하자 더욱 그애가 으스대는 것 같아 속이 편치 못하다가 드디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절교를 하고 말았다. 곧 후회했지만 우정이 유별났던 만큼 상처도 커서 결국은 화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상급 학교로 헤어졌다. 나는 숙명에서도 그애를 잃은 빈자리를 메워줄 만한 친구를 못 사귀어 늘 외톨이를 면치 못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그 무렵 그애한테서 먼저 편지가 왔다. 나는 즉각 답장을 썼고, 편지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마음을 털어놓은 관계가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일요일엔 만나기도 했지만 만나나 안 만나나 서로가 힘이 되고, 기쁨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 [박완서]우정 [A] 해방 후 J는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용인으로 내려가 국민학교 선생이 됐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3년 수료 정도로도 지방의 국민학교 선생은 가능할 때였다. 시골, 서울로 서로 오가기도 했지만, 변함없이 편지질도 계속했다. 6·25 사변 후 서신 연락이 두절되고 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결혼해서 몇 아이의 어머니가 된 후에도 ‘친구’ 하면 제일 먼저 J가 떠올랐고, J와의 우정이 나의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보석처럼 빛내주고 있음을 느끼고 무한한 감회에 젖곤 했다. 내가 마흔 살이란 좀 뒤늦은 나이에 소설을 써서 문단에 데뷔를 하고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나서였다. 나는 20여 년 만의 J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신문사에서 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나는 흥분해서 당장 만나자고 대강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J는 너무 늙고 초라했다. 앞니가 두 개나 빠진 걸 해 넣지 않고 있어서 할머니처럼 보였고, 손은 거칠고 옷차림은 구질구질했다. 그러나 밝게 웃으면서 자기가 처한 곤경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털어놓았다. 남편이 반신불수로 오래 누워 있는데 정신마저 정상이 아니어서 많이 힘들다는 얘기와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중학교 이상 시키기가 벅차다는 얘기를 담담히 늘어놓았다. 나는 약간 수선을 떨며 그녀에게 불고기를 해 먹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J는 나에게 중학교를 나와 집에서 아버지 시중을 드는 맏딸의 취직을 부탁했다. 별로 발이 넓지 못한 나는 난감했지만 어떻든 알아보마라고 했다. 취직 건으로 J는 그후에도 몇 번 우리집에 왔지만 나는 내 무능함이 창피한 나머지 그녀에게 비관적인 한탄이나 하기 일쑤였다. 그녀의 초조한 태도와 초라한 모습에서 그녀의 곤궁을 눈치챈 우리 식구들은 취직을 못 시켜주더라도 우선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자고들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자존심이 상할 것을 우려해서 그런 의견을 못 들은 척했다. J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을 끊었다. 그리고 여지껏 그녀의 소식을 모른다. 나는 그때 J를 경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했었다. 나도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돈을 주는 걸 삼갔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핑계일 뿐 실상은 내 마음이 인색해서가 아니었을까 목마른 친구에게 물을, 헐벗은 친구에겐 옷을, 궁색한 친구에겐 돈을 우선 주고 보는 게 우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관포管飽의 교우를 동양적인 우정의 이상으로 삼아왔다. 관중管仲이 포숙아飽叔牙에 대해 한 말은 누구나 새겨둘 만한 얘기다. “내가 아직 젊고 가난했을 때 포군과 장사를 같이 한 일이 있는데, 그 이익을 나눌 때 늘 내가 그보다 많이 가졌다. 내가 가난한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한 내 일이 실패해서 되레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도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이나 관리가 되었다가 쫓겨난 일이 있지만 그는 그걸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운수가 트이지 않았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갔다가도 몇 차례나 져서 도망쳤지만 그걸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게 늙은 어머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주신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 알아준 사람은 포군이었다.”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 J를 못 도와준 게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아아 나도 그때 J에게 돈을 주었어야만 했었다. 그때 J는 너무도 궁색했었으니까. — [박완서]우정 [B] 오학년 때였는데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다. 전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이 나하고 짝을 시켰다. 전학해 온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동안 마음이 순한 아이하고 짝을 시키는 게 선생님들의 공통된 버릇이었다. 나는 반에서 존재 없는 아이여서 아무 일에도 뽑힌 적이 없건만 그런 일엔 단골로 뽑혔다. 나는 속으로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 놓고 싫은 눈치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바라는 유일한 기대를 배반할 용기가 없어 그런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성만 일본식으로 갈고 이름은 복순이라는 촌스러운 본명 그대로였다. 생긴 것도 촌스럽고 의복도 남루한 편이었다. 그 애하고 짝이 된 첫 시간에 배운 국어가 도서관에 대한 거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선생님은 너희들도 실제로 도서관을 한번 이용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도서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근면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정직에 대해서 나오면 정직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도덕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가 보다 들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복순이가 다음 일요일 날 같이 도서관에 가 보자고 나를 꼬였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공립도서관의 위치를 잘 들어 두었는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어책에 나온 대로 거기서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빌려 보면 얼마나 신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애는 책 보는 재미에 대해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었다. 그 애에 비해 나는 처녀지와 다름이 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일요일 날 같이 가기로 하고 먼저 그 애 집을 알아 놓기로 했다. 그 애 집은 누상동이었다. 문안에도 그런 집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초가집 추녀가 어찌나 낮게 땅으로 드리웠는지 문자 그대로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게 생긴 집이었다. 평지라 수돗물이 나오는 것만 빼면 우리 집보다 훨씬 못했다. 삼 남매에다 부모님 할머님까지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안돼 보였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은 온종일 침을 흘리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박약아였고, 엄마는 홧김에 그렇게 됐는지 시어머니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명랑한 그 애가 불쌍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 애는 손수 부엌에 들어가 감자 껍질을 몽당숟가락으로 박박 벗기더니 쪄서 나에게 대접했다. 그런 꾸밈없는 태도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나에게도 드디어 동무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 놀 애가 아주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내 우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 준 건 그 애가 처음이었다. 도서관 가는 게 학교 숙제라고 했더니 단박 엄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공일 날 아침, 그 애네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의 길은 나에겐 멀고도 낯설었다. 그 애도 처음이어서 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어 간신히 당도한 곳은 아이들이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게 생긴 건물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 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낼 듯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 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 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府立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 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 열람실은 본관에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 한 별관이었다. 들어가는 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 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 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 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집 서가의 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 촐싹거리기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였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5월이 학년 말이었으니 당연히 6월 초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리대는 그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중순경에 입학식을 했다. 자연히 강의도 며칠 못 듣고 25일이 되었다. 집은 그동안에 전세를 들 만한 마땅한 사람이 생겨서 계약하고 중도금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작은집의 내 방도 도배를 새로 했고, 학교 사택도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대강의 수리와 도배를 끝마치고 엄마가 받아 놓은 손 없는 날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주말에 돌아온 오빠와 나는 서로 나눠 가질 책을 분류했다. 인민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긴 했지만 전에도 삼팔선에선 충돌이 잦았고 그때마다 국군이 잘 물리쳐 왔기 때문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설사 전하고는 다른 전면전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시골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이차대전의 경험에 미루어 다분히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날수록 시골로 가길 참 잘했다고 야비다리를 피우면서 살 수 있을지언정 후회할 까닭이 없었다. 그때까지 이승만 정부가 장담해 온, 만약 전쟁이 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으리라는 선전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라 해도 세뇌 효과는 무시 못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 삼팔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다음 날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고, 나는 동숭동 문리대로 등교했다. 등교하면서 가로수를 꺾어서 철모와 군용차를 시퍼렇게 위장하고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국군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전쟁의 현장감을 느꼈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만세도 불렀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누군가가 양주동 선생님 강의를 도강하러 가자고 했다. 도강이란 말도 대학생이 된 기분을 쾌적하게 자극했지만, 유명한 학자의 실물을 본다는 건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도강은 아니었지만 입학하고 얼마 안 있다 들은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강의 시간에도 그렇게 설레었는데 역시 유명한 분을 직접 뵙는다는 게 자랑스러웠을 뿐 그분의 학문이나 업적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고명한 학자나 명사가 지금처럼 대중 앞에 모습이나 목소리를 드러낼 기회가 없이 문자 그대로 상아탑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분들을 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가히 도취할 만한 대학생의 특권이었다. 그때도 양주동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해서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맨 뒤에 끼어 서서 해학과 유식을 폭포수처럼 토해 내며 강단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선생님의 강의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는데, 간간이 강의실 유리창이 들들들 울릴 만큼 포 소리가 가까워질 적이 있었다. 작달막하지만 몸매가 다부진 그분이 그 소리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강의를 계속하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학 길은 아침과 좀 달랐다. 여전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환송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날 밤새도록 엄마가 구시렁대면서 이럴 때는 식구가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소리를 하고 또 했다. 나도 오빠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여서 더욱 엄마가 그러는 게 듣기 싫었고, 진작 독방을 갖지 못한 게 짜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는 포 소리가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쏘는 것처럼 가까이 들렸다. 그러나 긴급 뉴스는 국군이 인민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처럼 말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기를 당부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학교로 향했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 시민들이 뭔가를 물어보려는 걸 순경이 말리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 그들이 의정부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피난민을 눈으로 보고서야 덜컥 겁이 났지만, 설마 순수한 양민은 아니겠지, 아마 지레 겁을 먹은 악덕 지주거나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경찰 가족쯤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꿈에도 인민군이 쳐들어오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의 그런 견해는 다분히 좌경 사상에서 영향받은 바가 없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강의 없이 여학생에게 귀가 조치가 취해졌고, 남학생들은 따로 학도호국단 명의로 북진 통일을 다짐하는 궐기대회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호국단 간부들이 목청껏 결의문을 읽고 구호를 선창하는 걸 옆에서 잠시 지켜보았지만 거의 위로가 되지 못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C] S대 건물은 대부분이 인민군에게 점거되어 겨우 본관에서 꽤 떨어진 함석지붕의 창고 비슷한 건물을 민청 문리대 민청위원회에서 빌려 쓰고 있었고. 그곳은 꼭 찜통 속 같았다. 함석지붕 때문에 또는 서쪽으로 뚫린 유리창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정상 체온 이상의 열기를 뿜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이에겐 여겨졌다. 아침 조회에 수령을 예찬하는 노래로부터 차츰 열광하기 시작해서 그날 발표되었다는 수령의 호소문을 다시 열광적으로 지지 호응함으로써 완전히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다음은 민청위원장의 훈시로 먼저 영용한 인민군대가 어제는 어디어디를 해방시키고 계속 물밀듯이 남진한다는 전과보도와 앞으로 한층 선전선동사업과 등교공작에 창의성을 발휘하여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장황한 연설은 중간중간에 열띤 갈채로 몇 번이고 중단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괴뢰도당에 대한 증오의 대목에 가서 마침내 그 열기는 숨막힐 듯이 고조되고, 그 고조된 상태의 지속을 위해 그날의 모든 과업이 있었다. 진이는 이런 분위기에서 뭔가 몹시 허덕이고 있었다. 등교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아직 한 번의 강의도 없었거니와 교수들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학원은 완전히 학생들의 것이었다. 교양시간이란 것이 매일 있었지만 민청위원장과 문화선전부장이 교대로 교양을 맡고 있었고 교재는 신문이 주였다.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와 김일성의 호소문이 기사의 전부인 신문은 위원장에 의해 재독 삼독되고 여럿에 의해 감격적으로 공감되고 정열적으로 호응되었다. 교양시간에는 신문공부 말고도 또 당사黨史연구가 있었다. 소련 공산당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것은 새롭고 흥미 있는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반동을 적발 숙청하는 데 얼마나 주도하고도 과감했는지는 과연 경탄할 만했고 사회주의 혁명의 지난함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교양시간을 치르고 나면 머릿속은 완전히 영웅적, 애국적 당과 인민을 위한 사상으로 충만했다. — [박완서]목마른 계절(세계사, 2012)
[A] “어머니는 어린 딸이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미처 적응할 새 없이 더 지독한 교육열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즉 이왕 서울에 온 김에 그 빈촌의 학군인 변두리 소학교에 갈 게 아니라 시내 중심지의 학교에 보낼 욕심을 부리셨다. 나의 기류계는 사직동 친척 집으로 옮겨졌고, 당시만 해도 소학교도 시험 치고 들어갈 때라 나는 시험 준비로 가짜 주소를 달달 외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박완서]나와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시험 [A] “국민학교에 들어갈 준비로 한글 말고도 일본 가나도 배웠다. 어머니는 가나를 어디서 익혔는지 그걸 가르쳐주실 때는 한결 더 으스대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가나를 읽고 쓰는 건 단박 배웠지만 한글을 익히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박완서]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초등학교 #입학시험 [A] “시험 치기 바로 전날 나는 처음으로 이발소라는 데를 갔다. 서울 올 때 머리꼬리는 자르고 단발머리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눈썰미와 솜씨만 믿고 손수해주신 비슷하지만 어색한 단발머리였다. [……] 나는 의자에 높이 앉아 거울 속에서 내가 면도하는 걸 지켜보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삐뚤삐뚤하던 앞머리가 단 한 번의 가위질로 눈썹 위에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좌우가 다르던 옆머리도 귓불을 내놓을 만한 높이에서 정확하게 대칭의 사선을 그으며 뒤로 넘어갔다. 부글부글한 비누 거품이 뒤통수와 이마를 뒤덮고 새각새각 상쾌하게 면도날이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면도한 뒤통수와 이마에 분가루가 뿌려졌다. 거울 속의 나는 영락없는 도시 아이가 돼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에 황홀했다.“ — [박완서]시험 준비 #초등학교 #입학시험
예배당에 다니는 아이에 대해 처음 안 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숙제로 지어온 작문을 차례로 읽는 시간이었는데, 어떤 아이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얘기를 읽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존재 없는 아이였는데, 그 내용 또한 하도 황당해서 무슨 잠꼬대를 하나 하고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잘 썼다 못 썼다는 평 대신 “너 예배당에 다니니”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에 대한 경멸과 동네 예배당 길의 적막이 나의 유년기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바늘구멍만한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기독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던 일제 말기의 일이다. — [박완서]나의 크리스마스
[B] 사학년 때부터 원족이 수학여행으로 바뀌는 건 모든 국민학교의 정해진 관례였다. 사학년 땐 인천, 오학년 땐 수원, 육학년 땐 개성으로, 목적지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여행이라지만 자고 오는 건 아니고 단지 기차를 타고 갔다 온다는 걸로 그렇게 불렀다. 나는 우리 고향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게 싫고 은근히 근심이 되었다. 개성에 대해 다 알아서 시들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상 개성은 귀향할 때마다 거치는 고장일 뿐 변변히 구경한 적은 없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엄마가 미리 편지를 해 놨기 때문에 할머니나 숙모가 마중을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B]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간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는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굿이 들었을 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 부스러기가 늘 널려 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 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 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나에겐 굿 구경은 신기한 게 아니라 익숙한 거였다. 박적골은 유명한 무속의 본산인 덕물산德物山과 멀지 않았다.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거기서 삼 년에 한 번씩 타지방 무당까지 모여서 하는 큰굿은 유명했다. 그런 전국적인 굿 말고도 무당 집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이니까 개성 부자들이 재수를 비는 크고 작은 굿이 그치지 않았다. [중략] 큰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 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 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 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 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 만한 것이 전무한 긴긴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그러나 바로 그런 쏠쏠한 실속 때문에 굿 구경 또한 금지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름 교복은 흰 반소매 윗도리에 어깨허리가 달린 청색 치마였는데, 어느 날 그 치마 앞에다 굿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게 탄로가 나고 말았다. 색사탕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무소 앞마당에서 미끄럼 탄 것을 적발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나서, 이놈의 동네를 언제 면하냐는, 그 판에 박은 한탄을 또 했다. 엄마는 아마 맹자의 엄마처럼 당장 여봐란듯이 그 동네를 뜨고 싶었겠지만 우린 맹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 돈이 없었고, 나는 맹자보다 똑똑하게 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었고 곧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초등학교 [C] 서울에 친척이 꽤 여러 군데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성공해서 여봐란 듯이 살게 될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아무도 안 찾아다니고 견딜 거라는 매서운 결심을 누차 우리 앞에서 다짐한 바까지 있는 엄마가 여기저기로 친척댁을 수소문해 나서기 시작했다. 문안이라도 현저동에서 가까운 문안에 사는 친척을 남대문입납으로 찾아나서는 엄마를 효자 오빠까지도 참 엄마도 주책이셔, 하면서 쓴웃음 짓고 외면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친척을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고, 내 기류계는 그 댁으로 옮겨졌다. 그 댁은 사직동에 있었고 내가 가야할 학교는 매동학교였다. 엄마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문안에서 친척을 찾아낸 엄마의 요행과 나의 운을 두고두고 되뇌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전차를 안 타고 갈 수 있는 학교라는 건 나에게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전차를 안 타고 걸어다니려면 하다못해 독립문을 지나 당당히 문안으로 입성을 하는 기분이라도 맛보고 싶은 데 매동학교는 어떻게 된 게 인왕산 줄기가 흘러내린 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를 닮아 어느 만큼은 문 밖이라는 데 서울로부터의 소외 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문 안 학교 간다는 데 서울 구경에의 기대를 더 많이 걸고 있었다. 그런데 번화가 쪽과는 반대 방향의 산꼭대기 쪽으로 뚫린 문 안 가는 길은 실망스럽다 못해 미덥지 못하기까지 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B] 여고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시국은 이미 일제 말기였다. 정규 수업을 며칠 받아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장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도 했지만 가장 오래 지속된 작업은 운모雲母 작업이었다. 육각, 오각, 사각 등으로 각이 진 반투명의 운모 조각은 얇게 벗겨지길 잘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상자로 하나씩 운모를 받아다가 끝이 뾰족한 칼로 얇게 박리剝離를 시키는 일이었다. 그걸 어디다 쓰는지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떠도는 말로는 비행기 유리창에 쓴다고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유리창으로만 된 비행기가 있다면 모를까 비행기 동체를 만들 물자가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때, 우리가 일할 운모는 마냥 공급이 되었다. 대포알을 만든다고 집집의 놋그릇까지 다 걷어 갈 때였다. 궁핍이 극도에 달했고 혹독하게 추운 날 솔방울을 줍는 일에 동원되어 신촌 어딘가의 산을 헤매다가 언 밥을 덜덜 떨며 먹은 적도 있다. 솔방울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고, 도처에 껍질까지 벗겨 가 죽어 버린 나무들을 보고 사람보다 더욱 헐벗고 피폐해진 국토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공연습도 자주 했고, 우리 학교의 대피 장소는 기숙사 지하의 석탄도 저장해 두고 아궁이도 있는 데였다.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콧구멍이 새까매졌다. 연습이 아닌 진짜 공습경보가 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집으로 보냈는데 아직도 현저동에 살고 있던 나는 혼자서 집까지 뛰는 동안 도중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맛보곤 했다. 책가방 없이 등교할 수 있는 날도 반드시 휴대해야 하는 게 구급낭이었다. 구급낭 속엔 아주 초라한 구급약과 함께 부상을 당했을 때 지혈을 시킬 수 있는 삼각건이 들어 있었고, 각자의 성명, 주소, 혈액형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삼각건 매는 법도 되풀이해서 교습을 받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게 유효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경, 대판 등이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단 소식은 신문에도 났지만 풍문으로 더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을 일본 당국은 유언비어라는 죄목까지 만들어 놓고 단속을 했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미국이 조선은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A] 그때는 학기초가 사월이었으니까 시험은 삼월에 있었을 텐데도 날씨가 몹시 추웠다. 나는 눈길을 헤치고 서울에 올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두루마기에 털신을 신고 어머니가 친척집에서 얻어온 흰 토끼털 목도리를 했다. 빨간 유리구슬로 눈까지 박힌 예쁜 목도리였다.” — [박완서]시험 준비 #초등학교 #입학시험 [A] 주먹을 쥐고 책상에 앉았던 남자 선생님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내 눈앞에서 주먹을 펴니까 한 주먹에서 하얀 바둑알이 네 개, 또 한 주먹에선 까만 바둑알이 세 개가 나왔다. “모두 몇 개냐” 선생님이 물으셨다. “일곱 개여요.” 얼른 그렇게 대답하면서 속으로 나는 백까지도 셈을 할 줄 아는데 이건 너무 쉽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연필로 그린 그림을 두 장 보여주었다. 한 장의 그림엔 넥타이 맨 신사하고 가방을 든 학생하고 같이 서 있었고 또 한 장의 그림엔 중절모와 학생모가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신사를 가리키며 무슨 모자를 쓰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중절모를 가리키고 나서 선생님이 묻기도 전에 앞질러서 학생모와 학생을 한꺼번에 가리켰다. 나는 시험문제가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떡하든 내가 그 이상 가는 실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는 속으로 선생님이 나를 그 학교에 붙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험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어서 선생님은 또 그림을 한 장 꺼냈다. 예쁜 양옥집이 있고 양옥집 굴뚝에선 연기가 무럭무럭 나와 한쪽으로 나부끼고 있는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엉뚱한 질문을 했다.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냐는 거였다. 그림 속에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이번 문제에서도 뭐든지 단박 알아맞춘 실력을 발휘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얼른 연기가 나부끼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가리켰다. 선생님은 또 미소지었다. 나의 국민학교 입학시험은 그것으로 끝났다. 어머니의 예상문제는 하나도 안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걱정하시던 일, 일본말로 시험을 보면 어떡하나 하는 일도 안 일어났다. 뒷문으로 해서 시험장 밖으로 나오니까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나를 대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면서 시험 잘 쳤냐고 물으신다. “응, 다 맞았어.” 나는 의기양양 그렇게 대답했다. “다 맞았다는 애 붙는 거 못 봤다.” — [박완서]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초등학교 #입학시험 [B] 시험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주소 때문에 머릿속이고 암기력이고 엉망이 된 채 시험 날짜가 됐다. 엄마가 박적골로 데리러 올 때 해 가지고 온 연두색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도 새로 깎고 시험을 치러 갔다. 주소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았다. 바둑알을 네 개와 세 개로 따로 놓고 모두 몇 개냐고 물었고, 신사와 학생이 서 있는 그림과 중절모와 학생모가 있는 그림을 각각 보여 주면서 각자에게 맞는 모자를 골라 보라고 했다. 그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그림을 놓고 지금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불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문제를 세 개 내줬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개밖에 못 맞혔다. 바람이 연기가 나부끼는 반대 방향으로 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봤단 소리에 일단 안심을 하고 나서, 그래도 틀린 문제가 나오자 실망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고 단정을 했으면 그만이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두루마기 자락, 운동장 깃대 맨 꼭대기에 꽂힌 일본 국기 등을 맹렬하게 손가락질하면서 “시방 바람이 어디로 부냐 응, 어디로 불어 시상에, 그것도 모르다니 떨어져 싸다 싸.” 이러면서 분해했다. 운동장이 엄청나게 넓고 주위에 인가가 없었던 매동학교 운동장엔 그날따라 왜 그렇게 바람이 세찼던지. 그날 저녁에 엄마는 오빠를 붙들고도 내가 떨어진 걸 분해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초등학교 #입학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