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초등학교 1학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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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지역
    매동국민학교
  • 관련 연도
    1938
  • 연관검색어
    초등학교, 가정방문

[A] 50년 전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는 내 가슴에 하얀 옥양목 손수건을 접어서 핀으로 달아주었다. 이제 학생이 되었으니 코를 소맷부리로 닦지 말고 손수건으로 닦으라는 뜻이었다. 학교에 가보니 다른 아이들도 다 이름표와 함께 손수건을 그렇게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런 전통은 몇십 년 후 내가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낼 때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내려왔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달라져 아동복도 모양과 질이 수많은 변천을 거쳤건만 국민학교 신입생의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다는 풍습만은 변함이 없었다. 새 옷을 못 사 입히는 집일수록 손수건만이라도 눈에 띄게 희고 구김살 없는 것으로 달아주려고 애썼다. 그렇게 어머니들이 정성을 기울이던 국민학교 신입생의 표시가 어느 틈에 없어지고 만 것일까 — [박완서]없어진 코흘리개 #초등학교 #입학식 [A] 통학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 동네 학군의 학교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시궁창을 겸한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곤두선 듯 경사가 급한 층층다리를 지나서 전찻길을 건너야 하는 위험부담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왕산 넘어 사직동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지만 평탄한 외길이었다. 엄마도 나도 시골뜨기답게 산길을 혼자 넘어 통학한다는 걸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 [박완서]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초등학교 #통학 [A] 공부도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중략] 나만의 등굣길은 고독했지만 모범생 아니면 될 수 없는 기대를 걸머진 열등생이 일탈할 수 있는 유일한 샛길이었다.— [박완서]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초등학교 #통학 [A] 그때는 서울을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으로 나누어 문안, 문밖이라 부르며, 집값의 격차로부터 갖가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가뜩이나 어리둥절한데 두 가지 주소를 외워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물어보면 대답할 주소와 길에서 혹시 집을 잃어버리면 대답할 진짜 주소와. 그것은 나이 어린 시골뜨기 계집애에겐 적지 아니 고통스러운 부담이었다. 엄마는 늘 그 둘을 행여나 헷갈리는 일이 있으면 큰일난다고 일러줬고, 그럴수록 나는 꼭 그걸 헷갈리고 말 것 같아 겁이 났고 동네서고 학교서고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 서울 애들은 영원히 저희 끼리끼리만 놀지 나 같은 건 붙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죽고 싶도록 절망적인 것이었다. — [박완서]도시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학교생활 — [A] 입학하자 며칠 후부터 시작된 가정방문 때만 해도 그랬다. 어머니는 어떡하든 입학시험을 위해 속인 가짜 주소에서 선생님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소를 빌려준 친척 댁에 양해를 구해 그날 하루 어머니가 그 집주인 노릇을 하기로 했다. 거짓말은 애당초 시키기가 잘못이었다. 일은 점점 더 복잡하게 했다. 먼 친척이어서 나는 그 집을 별로 가본 일이 없었고 그 집은 꼬불꼬불 복잡한 골목 속에 있었고 나는 촌 계집애답게 길눈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연 사흘을 학교에서 그 집까지 가는 연습을 나에게 시켜주셨다. 나는 그 친척 댁의 사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전형적인 서울의 중류 생활양식을 볼 수가 있었다. 골목이 좁고 기와집이었으나 지붕이 낮고 행랑채와 안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문간에서 볼 수 있는 행랑방은 더럽고 냄새나고 누덕누덕 기운 이부자리가 낮에도 펴 있었고 그 속에선 행랑아범이 코를 골고 있었다. 행랑어멈은 늘 바지런하게 공처럼 굴러다니면서 주인집 아이들을 작은아씨 아니면 도련님으로 불렀고 어른은 나으리, 마님, 아씨로 부르면서 얼굴엔 늘상 비굴한 아부의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울서 못사는 사람이 시골서 못사는 사람보다 훨씬 천격스러워 보였다. 행랑어멈의 여러 아이들이 흰 밥풀은 하나도 안 섞인 샛노란 조밥을 아귀아귀 먹는 모습은 숫제 무서웠다. 안채는 바깥채에서 댓돌을 두 단쯤 더 올라간 곳에 있었고 마루는 새까맣고도 반들반들했고 찬장도 뒤주도 반들반들했다. 장독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독들도 반들반들했고 학과 사슴과 거북이 입에 불로초를 물고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그림이 있는 화초담은 보기 좋았다. 안방은 대낮에도 침침했고 머리를 곱게 쪽찌고 안경을 쓴 친척 할머니는 언제나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눈은 섬찟하도록 차가왔다. — [박완서]서울 친척 #초등학교 #1학년 #가정방문 [B] 초여름에 가정방문이 있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완벽한 정직을 요구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정직 교육에 가장 역점을 두는 듯했다. 수신 교과서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천황에 대한 충성 다음이 정직이었다. 거짓말을 시킨 아이가 선생님에게 가장 큰 수모를 받았다. 물건이나 돈을 주웠을 때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학교 밖에서는 파출소에 갖다주어야 한다는 것도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떨어진 물건을 보고도 못 본 척해라. 줍긴 왜 주워. 떨어트린 사람은 되짚어 오게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찾아가게 그냥 놔두면 될걸. 잘난 척하고 싶은 사람이나 파출소나 선생님한테 갖다 바치는 거란다.” 아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주인이 찾으러 오기 전에 딴 사람이 집어 가면 어떻게 하냐고 당연한 걱정을 하면, 엄마는 그건 남의 것 가져가는 사람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상관할 거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엄마가 꿈꾼 건 황금 보따리를 떨어트렸다가도 제자리에서 도로 찾을 수 있는 이상 사회였을까 아니면 선행의 이기주의였을까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직의 완벽주의가 거짓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려는 게 문제였다. 엄마는 내 기류계를 가짜로 옮겨 원하는 학교에 집어넣었으면 그만이지, 그걸 가정방문 때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아마 중간에라도 탄로가 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촌사람다운 고지식한 우려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나는 엄마의 그런 이중성에 맞장구치기가 지겨웠다. 그만하고 싶었다. 엄마는 학교생활에 대해 뭘 너무 모르면서 그날 하루만 때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직동 방면을 도는 날은 미리 정해졌기 때문에 엄마는 그날만 그 집 안주인 노릇을 하기로 친척 집의 양해를 구했다. 그날은 사직동 방면 아이들만 교실에 남아 있다가 선생님하고 같이 하교를 했다. 그 애들은 이웃해 살거나 등하굣길에 만나는 아이들이라 서로 누구 집이 어디라는 것도 대강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순서로 순번을 짜는데 나는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처졌다. 교실에서도 존재 없는 아이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떤 아이가 쟤는 우리 동네서 처음 보는 아이라고 하자, 딴 아이들도 그래그래 하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흘끗거렸다. 그 아이들과는 딴판인 내 촌스러운 복장이 그 말 한마디로 이단시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재빨리 시골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거라고 꾸며 댔다. 그 고비는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맨 나중까지 남은 애가 우리 친척 집 바로 이웃이었다. 그 애는 영악하고 상냥하게 생긴 애였는데 내일서부터 학교 갈 때 서로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안 돼, 우린 내일모레 또 이사 갈 거야.”라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덧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친척 집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 선생님을 맞았고 행랑어멈이 화채를 은빛으로 닦은 놋쟁반에다 받쳐 내왔다. 그날을 무사히 넘긴 엄마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친척 집 옆에 산다는 아이는 나에게 오랫동안 화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애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그 애가 시키는 심부름은 뭐든지 했다. 고무줄을 나더러는 잡고만 있게 하고 혼자서만 깡충깡충 뛰어넘는 건 약과였다. 신을 괜히 벗어 던지고 나보고 주워 오라고 명령하면 별수 없이 주워 왔다. 그 애는 그걸 즐겼고 아이들 사이에선 내가 그 애의 꼬붕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 애가 정말 내가 주소를 속인 걸 큰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군림한 건지, 내 자격지심으로 괜히 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애한테 만만하게 보인 건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 사회에서 그런 주종 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걸 뒤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는 학교생활이 지옥 같았고, 집에 와도 심심해서 몸이 비비 꼬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연히 우리 동네 학교 다니는 아이들끼리만 몰려다녔다. 산까지 넘어 문안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중뿔난 시골뜨기를 이단시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가정방문 [C] 일 학년 담임선생은 내가 처음 만난 엄마가 말한 신여성의 구색을 한몸에 갖춘 분이었다. 머리를 반가리마를 타서 뒤에서 히사시까미로 빗어 올리고 흰 하부다이 저고리에 검정 지리면 통치마를 입고 까만 뾰족구두를 신었다. 출퇴근 때는 까만 핸드백을 들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이치를 모르는 거 없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우리들이 물어보는 아무리 어려운 질문도 한 번도 못 대답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뭐든지 알고 있을뿐더러 누구든지 사랑했다. 약간 주근깨가 있는 화장 안한 수수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선생님 둘레엔 항상 많은 아이들이 따랐다. 운동장에서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걸음도 제대로 못 옮기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는 햇병아리를 거느린 암탉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멀찌감치서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손톱을 질겅질겅 씹었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등교나 하교시간에도 손톱을 씹었기 때문에 엄마가 따로 깎아줄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선생님 손을 잡아보고 싶어했다. 선생님 손은 누구든지 잡고 싶어하고 갖으면 놓지 않는데 선생님 손은 둘 뿐이니까, 아이들을 어디까지나 고루 사랑하는 선생님은 번갈아 잡아주려고 애썼다. 자아, 아직도 선생님 손 못 잡아 본 사람 손 들어요. 그럼, 나요나요 하고 아이들이 손을 들면 선생님은 그 중에서 영낙 없이 정말 못 잡아 본 애 손만 가려내서 꼭 쥐어주기도 하고 쓱쓱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손톱을 씹으면 씹었지 손을 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고루 사랑할 것 같은 선생님 특유의 상냥한 미소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단언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1학년 #가정방문 [A] 엄마 손 잡고 첫 등교하던 날 나는 나의 촌스러움보다는 어머니의 초라함이 남부끄러워서 엄마의 손을 얼마나 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 이미 신식 엄마들은 쪽 같은 거 찌지 않았고 파마나 트레머리를 하고 있었고, 얼굴에 화장하고 옷도 고운 비단옷이었다. 쪽찌고 뻣뻣한 무명 치마저고리에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것도 창피한데 어머니는 일본말도 못했다. 당시에는 담임이 일본 사람이 아니라도 학부형을 상대로 꼭 일본말을 썼다. 심지어는 일대일로 말할 때도 통역을 가운데 놓고 말하는 조선인 선생도 있었다. 학년이 높아짐에 따라 같은 반 동무들이 통역을 맡게 됐지만 일본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학부모는 한 반에 몇 안 돼 나는 그게 여간 수치스럽지가 않았다. 제발 어머니가 학부형회에 참석을 안 해주길 바랐지만, 괜히 학교에 오신 적도 없었지만 학부형회가 있는데 빠지실 어머니도 아니었다. 시골서는 가장 유식해 보이던 어머니가 서울서는 글커녕 말도 안 통하는 무식쟁이 대접을 받는 것은 나로서는 여간 참아내기 힘들지가 않았다. —[박완서]나의 어머니 #초등학교 #1학년 #가독 #어머니 [A] 학부형회 날이 왔다. 1학년 첫 학부형회라 거의 모든 학부모님들이 모이셨다. 어머니하고 딸은 참으로 비슷비슷했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답게 촌스러웠고 그 아이 어머니는 그 아이 어머니답게 젊고 예쁘고 멋쟁이였다. 만약 그애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한 가지라도 나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애 엄마를 골라잡겠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의 촌스러움보다는 어머니의 촌스러움이 창피해서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학부형회가 끝난 다음 나는 그애한테 “느네 엄마 참 예쁘다”는 선망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애는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도리어 뾰로통하더니 한참 만에 자기 비밀을 하나 가르쳐줄 테니 절대로 반 아이들한테 풍기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제부터 들은 얘기를 아무한테도 말 않겠다는 맹세로 그애와 새끼손가락 걸기를 했다. 그애는 내 귀에다 대고 그 엄마는 의붓엄마고 친엄마는 나쁜 의붓엄마 때문에 쫓겨났다고 했다. 내가 아는 의붓엄마는 콩쥐팥쥐의 엄마, 장화홍련의 엄마가 전부였으므로 그애가 의붓엄마하고 살면서도 매도 안 맞고 예쁜 옷 입고 학교 다니는 게 암만해도 이상했다. 그애는 내가 믿지 않는 걸 알자 나쁜 의붓엄마라는 걸 어떻게든 나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그 의붓엄마가 바에서 술 따르던 여자였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그 말을 누구한테 풍기지 말라고 거듭거듭 다짐하고 안달을 했다. 나는 내가 안 한다고 한 말은 절대로 안 하는 신용 있는 아이라는 걸 그애한테 인식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나 역시 그애한테 나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거였다. 나도 그애와 마찬가지로 엄숙하게 새끼손가락 걸기를 하고 나서 내가 주소를 속이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과 나의 정말 주소는 고개 너머 현저동 감옥소가 있는 동네라는 고백을 했다. 그애는 나의 고백을 별로 탐탁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애가 탐탁해하지 않자 나는 내 비밀이 그애의 비밀만 못한 것 같아 무안했다. 그러나 그애는 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다. 내가 감옥소 동네 아이란 소문이 확 퍼졌다. 나는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차라리 선생님이 나를 내쫓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났다. 당시의 학구제란 시험 때만 잠시 유용한 거였다. 그때 일이 나에게 어떤 계기가 됐다면, 그건 내가 다시는 그애의 ‘꼬붕’ 노릇을 안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애를 그때부터 경멸했기 때문이다. — [박완서]서울 아이 #초등학교 #1학년 #친구 [A] 그때는 서울을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으로 나누어 문안, 문밖이라 부르며, 집값의 격차로부터 갖가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가뜩이나 어리둥절한데 두 가지 주소를 외워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물어보면 대답할 주소와 길에서 혹시 집을 잃어버리면 대답할 진짜 주소와. 그것은 나이 어린 시골뜨기 계집애에겐 적지 아니 고통스러운 부담이었다. 엄마는 늘 그 둘을 행여나 헷갈리는 일이 있으면 큰일난다고 일러줬고, 그럴수록 나는 꼭 그걸 헷갈리고 말 것 같아 겁이 났고 동네서고 학교서고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 서울 애들은 영원히 저희 끼리끼리만 놀지 나 같은 건 붙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죽고 싶도록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에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것도 아주 예쁘고 똑똑해서 선생님이 귀여워하고 교단에 올라가서 봄이 왔다는 일본 노래를 독창까지 한 애가 내 친구가 돼주었다. 걔는 내 짝이었는데 고무나 연필을 교실 바닥에 떨어뜨리면 나더러 주워달래고, 걸상을 책상 위에 얹는 일도 나더러 해달랬고, 나는 걔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다. 반 애들이 내가 걔 ‘꼬붕’이라고 했지만, 나는 꼬붕의 뜻을 잘 몰라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운동화를 한 짝 벗어서 한 발로 오랏말처럼 저만치 차 던지고 주워오라고도 했다. 아무리 시골뜨기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어서 시무룩하게 있으면 운동화가 없는 한쪽 발을 쳐들고 한 발만 갖고 깽깽발을 치면서,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하며 엄살을 떨면 집어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앙증맞고 깨끗한 도시 아이의 흰 양말에 흙이 묻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내 심정은 예쁜 인형을 아끼는 마음과도 비슷했지만 비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쁜 애는 친절하게 소근소근 속삭여서 재미있는 얘기를 할 적도 많았다. 한번은 학부형회가 있었던 날인데,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답게 제일 촌스러웠고 걔 엄마는 걔 엄마답게 예뻤다. 놀라운 것은 너무도 젊은 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느네 엄마는 참 예쁘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느네 엄마를 닮았냐”고 했다. 그러나 그애는 좋아하지 않고 이상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더니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무슨 말 하나 해줄게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했다. 나는 가슴을 다 두근대면서 절대로 말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래도 그애는 못 믿겠다는 듯이 내 새끼손가락과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면서 종알종알 주문 같은 걸었다. 주문이라야 별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 사회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이 약속을 안 지키면 무슨무슨 벌을 받는다는 기괴하고도 황당한 것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상당히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엄숙하게 다시 한번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고 맹세를 했다. 그제야 그 아이는 입을 내 귀에다 대고, 저 여자는 자기 친엄마가 아닌 의붓엄마고 친엄마는 쫓겨났고 의붓엄마는 ‘빠아’에 다니던 나쁜 여자라고 했다. 나는 빠아가 뭐 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모르냐고 아주 나쁜 데라고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생전 처음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흐뭇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비밀을 통해 그 예쁜 애와 영원한 우정이라도 맺어진 것처럼 느꼈다. 실상 나는 그전까지는 그애가 나와 너무 맞지 않게 예쁘고 세련됐기 때문에 언제고 날 버리고 딴 애와 친해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빠아라는 데가 뭐 하는 덴지 그게 궁금해 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그 빠아라는 데 대해서 물어봤다. 엄마는 가르쳐주기는커녕 그런 못된 소리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야단야단치면서 그 소리를 들은 곳을 대라고 했다. 나는 그애와의 엄숙한 맹세를 생각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엄마는 나중엔 매까지 들면서 그 빠아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요즈음 상식으론 상상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땐 그랬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 비밀 때문에 매까지 맞고도 그애가 나에게만 그 비밀을 가르쳐줬다는 걸 감사했고 거기 무슨 보답을 하고 싶어했다. 마치 값진 선물을 받고 그것의 반값이라도 되는 걸로 보답을 하고 싶어 고민하는 만큼이나 진지하게 그 문제를 궁리했다. 마침내 나는 나도 그애에게 내 비밀을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내 비밀이란 다름이 아니라 주소가 두 개라는 거였다. 실제로 사는 주소를 속이고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가짜 주소를 썼다는 엄청난 비밀을 이 아이에게 고백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나한테 했던 것과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주문을 외고 나서 그애의 귀에다 대고 그 말을 했다. 말을 하고 나서 다시 한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만일 그 사실이 탄로가 나면 이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덧붙었다. 그러고 나니 빚이라도 갚은 것처럼 속이 후련할뿐더러 이제야말로 나와 그애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웬걸, 그 다음날로 내가 영천 사는 아이란 소문은 파다하게 펴졌다. 영천 사는 아이는 또 괜찮았다. 감옥소 동네에 사는 아이라는 거였다. 아이들이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악마처럼 악랄하고 잔혹한 데가 있다. 알라리 꼴라리 누구누구는 감옥소 동네에 산단다, 매일매일 전중이(죄수)만 보면서 산단다, 하고 반 아이들이 손뼉을 치면서 나를 놀렸다.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제일 큰 집이 죄인들을 가둬두는 데라는 건 알았지만, 그 동네 산다는 것까지 부끄러운 일이 된다는 건 처음 알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까지 내가 누상동이 아닌 영천에 산다는 걸 알게 되어 쫓겨나면 어쩌나 근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타격은 그 예쁜 애의 배신이었다. 손가락 걸기도, 맹세도, 주문도, 귓속말도, 어쩌면 그렇게 겁도 없이 외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배신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그때 학구제 위반으로 쫓겨나는 일도 안 당했고, 아이들의 놀림도 곧 가라앉았지만, 그때 그 얄쌍한 전형적인 서울 계집애의 배신이 안겨준 상처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것이었다. 나는 학교가 다니기 싫어서 차라리 쫓아내주었으면 싶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쫓아내길래 선생님께 우리집이 이 학교 관내가 아닌 영천이란 말씀까지 드렸다. 나로선 대단한 용기였다. 선생님은 그러냐고 말할 뿐 놀라지도 않았고 그후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 — [박완서]도시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친구 [A] 여름방학이고 겨울방학이고 방학만 했다 하면 그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개학 전날에나 올라오기를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했었다.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A] 해마다 두 차례 고향에서 긴 방학을 보낼 수 있을 때만 해도 고향이 없이 서울에서 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이 참 불쌍해 보였었다. 그애들도 똑같이 방학을 즐거워한다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방학이란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돌아갈 자연이 없는 순 서울 토박이 아이들이 긴긴 방학을 좁은 골목에서 기껏 고무줄이나 사방치기를 하며 보낼 생각을 하면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고, 내가 시골뜨기라는 데 행복감을 느꼈다. 실상 국민학교 때까지도 나는 시골뜨기 티를 못 벗어 종종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고 마음속 깊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열등감이 우월감이 될 수 있는 방학이 더욱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1930년대)만 해도 시골의 여자아이들은 거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릴 적부터 고된 가사노동을 익히게 했었다. 특히 농사일이 바쁜 여름철엔 계집애가 대여섯 살만 돼도 귀한 일손이었다. 다 해진 무명 띠로 동생을 온종일 업어줘야 하고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빨래도 해야 했다. 학교 갈 나이엔 벌써 밥을 지을 줄 알았고 치마 주름 정도는 달아 입을 줄도 알았다. 나는 서울서는 시골뜨기 티를 못 벗은 주제에 고향에 가서는 엉뚱하게도 서울서 신식 공부한 서울내기 티를 내지 못해했다. 그런 내가 얼마나 같잖아 보였던지 시골 아이들은 곧잘 나를 골탕 먹였다. 내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른 뱀을 왼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막대기로 때려잡아 막대기 끝에다 채찍처럼 휘휘 감아 보이기도 했고 즈네들은 먹는 버섯을 따면서도 나한테는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가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애들이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어내는 솜씨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서울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그런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그애들보다 내가 아는 게 더 많다는 같잖은 우월감 따위는 말끔히 가시고 그애들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르며 졸졸 따라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애들이 나와 함께 실컷 놀아준 것은 아니다. 낮 동안 그애들은 너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나는 걸리적대기만 했고, 나도 그게 얼마나 그애들한테 미안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집안에서 심심한 걸 참았다. 그러나 밤만 되면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웠다. 어른들은 멍석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세상 근심, 농사 근심, 동네 소문 등 시름에 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낮 동안의 고된 일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기력에 넘치는 기성을 지르며 떼를 지어 뛰어다녔다. 이 집 모깃불에서 저 집 모닥불로 매캐한 모깃불 연기를 부나비처럼 누비며 온 동네를 돌기도 하고, 냇물에 풍덩 뛰어들어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미역을 감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A] 밤만 되면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웠다. 어른들은 멍석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세상 근심, 농사 근심, 동네 소문 등 시름에 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낮 동안의 고된 일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기력에 넘치는 기성을 지르며 떼를 지어 뛰어다녔다. 이 집 모깃불에서 저 집 모닥불로 매캐한 모깃불 연기를 부나비처럼 누비며 온 동네를 돌기도 하고, 냇물에 풍덩 뛰어들어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미역을 감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동네 노인 중에는 옛날얘기 잘하는 노인도 있어 그런 노인은 아이들한테 인기였다. ‘할멈 할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단 방귀장수’ ‘잘생긴 신랑으로 변한 복숭아벌레’ 등이 다 그때 들은 옛날이야기다. 나는 이야기를 몹시 바치는 편이어서 집에서도 어머니나 할머니한테 졸라서 많은 옛날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여름밤 모깃불가에서 동네 노인들한테 들은 옛날얘기는 그보다 훨씬 구수하고 소박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옛날얘기가 문자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고대소설에 근거한 거라면 동네 노인의 옛날얘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면서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가미된 것이어서 훨씬 흥미 있고 자유분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귀신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는 질색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마지막 판에 가서는 꼭 무서운 이야기를 졸랐다. 처녀귀신, 총각귀신, 뒷간귀신, 달걀귀신 등 괴기한 귀신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오싹오싹하게 재미가 있었지만 그 이야기판이 우리집 마당이 아닐 경우 집에 돌아갈 일이 지레 겁이 나서 귀를 막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미 길엔 가로등이 있고 집은 다닥다닥 붙은 도시에 익숙해진 서울내기여서 시골 밤길이 싫고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나의 이런 도시적인 소심증을 시골 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길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속으로는 더욱 전전긍긍했다. 귀신 이야기를 실컷 듣고 나서 혼자 집에 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숨바꼭질을 하는 일이었다. 밤이 이슥해 모깃불도 사위어가고 어른들도 멍석에 네활개를 펴고 코를 골 무렵이면 아이들은 모깃불과 함께 흥이 사위어가는 걸 두려워하듯이 숨바꼭질 하자고 새로운 흥을 북돋았다. 시골의 여름밤은 으슥하고 캄캄한 구석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집집마다 가을에 비를 매려고 마당가에 둘러 심은 싸리나무만 해도 아이들 키가 넘었고 삼나무 밭은 서울내기의 어린 소견으로는 정글만큼이나 깊이 모를 미개지였다. 뒷간, 헛간, 외양간, 굴뚝 모퉁이, 장독대, 뒤란의 터줏자리 등 우리의 작은 몸을 숨길 데는 무궁무진했다. 물론 우리가 숨을 수 있는 한계는 미리 정해놓고 놀이를 시작했지만 누구네 집과 그 텃밭이란 한계가 서울내기의 좁은 소견으로는 황당하도록 넓게 느껴졌다. 불행히도 술래가 되어 감쪽같이 숨은 아이들을 찾아 으슥한 여름밤의 유난히 짙은 어둠이 고인 곳들을 하나하나 뒤질 때의 고독감을 무엇에 비길까. 옛날이야기 속의 귀신이 뒤쫓아오는 것 같아 제 발소리에 소스라치기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어둠도 사람을 감춘 어둠은 독특한 숨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죽자꾸나 자신의 소심증과 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여름밤의 숨바꼭질 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 [박완서]한여름밤의 숨바꼭질 #초등학교 #방학 #박적골 [C] 여름방학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위해서 야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가 화신상회에 가서 예쁜 옷을 골라서 살 것처럼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대강 눈대중을 해다가 그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나를 전차를 태워서 서울 장안을 한 바퀴 돌렸고 처음으로 동물원 구경까지 시켜 주었다. 뭔가 한꺼번에 수용하긴 벅차고 고될 만큼 엄마는 나에게 대처라는 걸 대량으로 주입시키려 들었다. 현저동에 살면서 박적골의 근거를 가장 으뜸가는 품성으로 숭배하고 지킬 것을 강요했듯이 박적골로 돌아가려는 마당에선 대처 티를 무작정 날조하려 들었다. 엄마가 만든 원피스가 나에게 어울리는지 꼴불견인지 분간할 안목이 나에겐 없었다. 모시 두루마기도 그림같이 짓는 내 솜씨가 그까짓 내리닫이 못 지을까 하는 엄마의 장담은 감히 비평을 불허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내 옷차림을 흘긋 일별만 하시고도 곡마단에서 깡깽이 켜는 년 같군, 하는 혹평을 하셨다. 나는 그 옷을 다신 안 입고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다시 꺼내 입었다. 겨울방학 땐 엄마는 좀더 요란하게 나에게 서울티를 내주었다. 엄마는 친척집에서 토끼털 목도리와 스케이트를 얻어왔다. 토끼털 목도리는 목에만 두르면 그만이지만 스케이트는 한 번도 타본 일이 없는 걸 어깨에다 척 걸어 주면서 썰매 타지 말고 그걸 타고 놀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나는 스케이트를 남이 타는 걸 한두 번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황홀한 묘기였다. 나는 그런 묘기의 비결이 그 날 달린 구두에 전적으로 달린 줄 알았다. 사랑마당 앞엔 텃밭이 있었고, 텃밭 너머론 동구 밖으로 지나는 길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길 건너가 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선 마을 개구쟁이들이 신나게 썰매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 요술구두를 신고 자신 있게 그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했지만 웬걸, 몸의 중심도 못 잡은 데다가 가랑이는 양쪽으로 벌어져, 넘어지지나 않으려고 헛된 제자리 춤을 추는 게 고작이었다. 썰매를 타던 개구쟁이들이 이 신기한 구경을 하려고 내 주위로 미끄러져 왔다.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준 건 집의 머슴이었다. 머슴은 다짜고짜 나를 업더니 겅정겅정 집으로 뛰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사랑의 할아버지 방에다 내려놓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장죽이 내 정수리를 연타했다. 번쩍번쩍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요년, 요 고얀 년, 신식공분지 뭔지 시킨다길래 대처로 내놓았더니 기껏 배웠다는 게 덕물산(德物山) 무당의 작두춤이냐 뭐냐 허어 해괴한지고! 암만해도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계집앨 대처로 내놓았는가부다.” 나는 정수리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판국에도 웃음이 북받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별일이었다. 기껏 상상력의 한계가 덕물산 무당의 작두춤인 할아버지가 그렇게 우스웠다. 덕물산이란 송도에 있는 최영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 산으로 거기 무당의 작두춤은 유명했다. 그 이유는 지당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할아버지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불쌍하기도 했다. 나는 벌써 별의별 걸 다 배우고 다 구경했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적골을 천하 삼고 못 벗어나다가 돌아가시겠지 하는 처량한 생각은 어린 계집애에겐 가당치 않은 거였지만 대처 물 먹은 티이기도 했다.—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방학 [A] 1학년 때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방학은 즐겁지만 특히 겨울방학엔 설이 껴서 그 즐거움이 각별했다. 나는 방학하는 날 곧장 시골로 내려갔다. 기차 속에서 서울서만 사는 아이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방학을 할까를 심각하게 의심하기도 했었다. 우리 고향 개성의 설음식 중에선 특히 강정이 유명하다. 강정 중에도 얄팍하게 밀어서 마름모로 썬 깨강정, 흑임자강정과 악간 도톰하지만 맛이 뛰어난 땅콩강정은 어린 눈에도 도시의 어떤 음식보다도 깔끔하고 세련돼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우리 선생님 좀 갖다드리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좋은 음식 보고 선생님 생각을 하는 나를 들입다 칭찬하시고 예쁜 동고리짝에다 강정을 수북이 담아주셨다. 그러나 개학날 그걸 가지고 학교까지 가긴 갔는데 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때까지도 그만한 숫기가 없었고, 막상 선생님을 뵈니 그런 시골 음식을 잡수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도로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고 생각다못해 하굣길에 사직 공원에서 아이들한테 풀어 먹이고 말았다. — [박완서]서울내기 시골뜨기 2 #초등학교 #1학년 #방학 #박적골 [C] 그 해 겨울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올 땐 할머니가 특별히 정성들여 만드신 깨강정하고 땅콩강정을 싸주시면서 담임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하셨다. 그걸 다시 서울서 엄마가 예쁜 상자에 담아서 보자기에 싸주셨지만 나는 그걸 선생님께 갖다드리지 않았다. 그 사이 조금씩 사귄 친구들을 사직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나눠 먹어버리고 말았다. 골고루 다 귀여워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기 반에 한 번도 자기 손을 못 잡아본 애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선생님의 위선을 복수한 맛이 깨강정 맛보다 더 고소하고 달콤했으나 깨강정에는 없는 씁쓸한 뒷맛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1학년 #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