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박적골 생활

기본 이미지
  • 관련 지역
    박적골
  • 관련 연도
    1931 ~ 1938
  • 연관검색어
    굿당, 음식, 초등학교

[B]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간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는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굿이 들었을 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 부스러기가 늘 널려 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 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 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나에겐 굿 구경은 신기한 게 아니라 익숙한 거였다. 박적골은 유명한 무속의 본산인 덕물산德物山과 멀지 않았다.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거기서 삼 년에 한 번씩 타지방 무당까지 모여서 하는 큰굿은 유명했다. 그런 전국적인 굿 말고도 무당 집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이니까 개성 부자들이 재수를 비는 크고 작은 굿이 그치지 않았다. [중략] 큰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 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 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 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 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 만한 것이 전무한 긴긴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그러나 바로 그런 쏠쏠한 실속 때문에 굿 구경 또한 금지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름 교복은 흰 반소매 윗도리에 어깨허리가 달린 청색 치마였는데, 어느 날 그 치마 앞에다 굿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게 탄로가 나고 말았다. 색사탕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무소 앞마당에서 미끄럼 탄 것을 적발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나서, 이놈의 동네를 언제 면하냐는, 그 판에 박은 한탄을 또 했다. 엄마는 아마 맹자의 엄마처럼 당장 여봐란듯이 그 동네를 뜨고 싶었겠지만 우린 맹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 돈이 없었고, 나는 맹자보다 똑똑하게 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었고 곧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초등학교 [C] 서울에 친척이 꽤 여러 군데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성공해서 여봐란 듯이 살게 될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아무도 안 찾아다니고 견딜 거라는 매서운 결심을 누차 우리 앞에서 다짐한 바까지 있는 엄마가 여기저기로 친척댁을 수소문해 나서기 시작했다. 문안이라도 현저동에서 가까운 문안에 사는 친척을 남대문입납으로 찾아나서는 엄마를 효자 오빠까지도 참 엄마도 주책이셔, 하면서 쓴웃음 짓고 외면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친척을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고, 내 기류계는 그 댁으로 옮겨졌다. 그 댁은 사직동에 있었고 내가 가야할 학교는 매동학교였다. 엄마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문안에서 친척을 찾아낸 엄마의 요행과 나의 운을 두고두고 되뇌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전차를 안 타고 갈 수 있는 학교라는 건 나에게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전차를 안 타고 걸어다니려면 하다못해 독립문을 지나 당당히 문안으로 입성을 하는 기분이라도 맛보고 싶은 데 매동학교는 어떻게 된 게 인왕산 줄기가 흘러내린 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를 닮아 어느 만큼은 문 밖이라는 데 서울로부터의 소외 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문 안 학교 간다는 데 서울 구경에의 기대를 더 많이 걸고 있었다. 그런데 번화가 쪽과는 반대 방향의 산꼭대기 쪽으로 뚫린 문 안 가는 길은 실망스럽다 못해 미덥지 못하기까지 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