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대학 입학과 동시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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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지역
    동숭동
  • 관련 연도
    1950
  • 연관검색어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입학, 한국전쟁, 6.25, 남침, 양주동, 이병기, 서울대학교, 인민군

5월이 학년 말이었으니 당연히 6월 초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리대는 그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중순경에 입학식을 했다. 자연히 강의도 며칠 못 듣고 25일이 되었다. 집은 그동안에 전세를 들 만한 마땅한 사람이 생겨서 계약하고 중도금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작은집의 내 방도 도배를 새로 했고, 학교 사택도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대강의 수리와 도배를 끝마치고 엄마가 받아 놓은 손 없는 날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주말에 돌아온 오빠와 나는 서로 나눠 가질 책을 분류했다. 인민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긴 했지만 전에도 삼팔선에선 충돌이 잦았고 그때마다 국군이 잘 물리쳐 왔기 때문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설사 전하고는 다른 전면전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시골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이차대전의 경험에 미루어 다분히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날수록 시골로 가길 참 잘했다고 야비다리를 피우면서 살 수 있을지언정 후회할 까닭이 없었다. 그때까지 이승만 정부가 장담해 온, 만약 전쟁이 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으리라는 선전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라 해도 세뇌 효과는 무시 못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 삼팔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다음 날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고, 나는 동숭동 문리대로 등교했다. 등교하면서 가로수를 꺾어서 철모와 군용차를 시퍼렇게 위장하고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국군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전쟁의 현장감을 느꼈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만세도 불렀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누군가가 양주동 선생님 강의를 도강하러 가자고 했다. 도강이란 말도 대학생이 된 기분을 쾌적하게 자극했지만, 유명한 학자의 실물을 본다는 건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도강은 아니었지만 입학하고 얼마 안 있다 들은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강의 시간에도 그렇게 설레었는데 역시 유명한 분을 직접 뵙는다는 게 자랑스러웠을 뿐 그분의 학문이나 업적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고명한 학자나 명사가 지금처럼 대중 앞에 모습이나 목소리를 드러낼 기회가 없이 문자 그대로 상아탑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분들을 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가히 도취할 만한 대학생의 특권이었다. 그때도 양주동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해서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맨 뒤에 끼어 서서 해학과 유식을 폭포수처럼 토해 내며 강단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선생님의 강의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는데, 간간이 강의실 유리창이 들들들 울릴 만큼 포 소리가 가까워질 적이 있었다. 작달막하지만 몸매가 다부진 그분이 그 소리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강의를 계속하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학 길은 아침과 좀 달랐다. 여전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환송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날 밤새도록 엄마가 구시렁대면서 이럴 때는 식구가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소리를 하고 또 했다. 나도 오빠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여서 더욱 엄마가 그러는 게 듣기 싫었고, 진작 독방을 갖지 못한 게 짜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는 포 소리가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쏘는 것처럼 가까이 들렸다. 그러나 긴급 뉴스는 국군이 인민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처럼 말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기를 당부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학교로 향했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 시민들이 뭔가를 물어보려는 걸 순경이 말리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 그들이 의정부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피난민을 눈으로 보고서야 덜컥 겁이 났지만, 설마 순수한 양민은 아니겠지, 아마 지레 겁을 먹은 악덕 지주거나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경찰 가족쯤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꿈에도 인민군이 쳐들어오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의 그런 견해는 다분히 좌경 사상에서 영향받은 바가 없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강의 없이 여학생에게 귀가 조치가 취해졌고, 남학생들은 따로 학도호국단 명의로 북진 통일을 다짐하는 궐기대회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호국단 간부들이 목청껏 결의문을 읽고 구호를 선창하는 걸 옆에서 잠시 지켜보았지만 거의 위로가 되지 못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C] S대 건물은 대부분이 인민군에게 점거되어 겨우 본관에서 꽤 떨어진 함석지붕의 창고 비슷한 건물을 민청 문리대 민청위원회에서 빌려 쓰고 있었고. 그곳은 꼭 찜통 속 같았다. 함석지붕 때문에 또는 서쪽으로 뚫린 유리창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정상 체온 이상의 열기를 뿜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이에겐 여겨졌다. 아침 조회에 수령을 예찬하는 노래로부터 차츰 열광하기 시작해서 그날 발표되었다는 수령의 호소문을 다시 열광적으로 지지 호응함으로써 완전히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다음은 민청위원장의 훈시로 먼저 영용한 인민군대가 어제는 어디어디를 해방시키고 계속 물밀듯이 남진한다는 전과보도와 앞으로 한층 선전선동사업과 등교공작에 창의성을 발휘하여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장황한 연설은 중간중간에 열띤 갈채로 몇 번이고 중단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괴뢰도당에 대한 증오의 대목에 가서 마침내 그 열기는 숨막힐 듯이 고조되고, 그 고조된 상태의 지속을 위해 그날의 모든 과업이 있었다. 진이는 이런 분위기에서 뭔가 몹시 허덕이고 있었다. 등교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아직 한 번의 강의도 없었거니와 교수들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학원은 완전히 학생들의 것이었다. 교양시간이란 것이 매일 있었지만 민청위원장과 문화선전부장이 교대로 교양을 맡고 있었고 교재는 신문이 주였다.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와 김일성의 호소문이 기사의 전부인 신문은 위원장에 의해 재독 삼독되고 여럿에 의해 감격적으로 공감되고 정열적으로 호응되었다. 교양시간에는 신문공부 말고도 또 당사黨史연구가 있었다. 소련 공산당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것은 새롭고 흥미 있는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반동을 적발 숙청하는 데 얼마나 주도하고도 과감했는지는 과연 경탄할 만했고 사회주의 혁명의 지난함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교양시간을 치르고 나면 머릿속은 완전히 영웅적, 애국적 당과 인민을 위한 사상으로 충만했다. — [박완서]목마른 계절(세계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