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B] 여고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시국은 이미 일제 말기였다. 정규 수업을 며칠 받아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장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도 했지만 가장 오래 지속된 작업은 운모雲母 작업이었다. 육각, 오각, 사각 등으로 각이 진 반투명의 운모 조각은 얇게 벗겨지길 잘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상자로 하나씩 운모를 받아다가 끝이 뾰족한 칼로 얇게 박리剝離를 시키는 일이었다. 그걸 어디다 쓰는지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떠도는 말로는 비행기 유리창에 쓴다고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유리창으로만 된 비행기가 있다면 모를까 비행기 동체를 만들 물자가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때, 우리가 일할 운모는 마냥 공급이 되었다. 대포알을 만든다고 집집의 놋그릇까지 다 걷어 갈 때였다. 궁핍이 극도에 달했고 혹독하게 추운 날 솔방울을 줍는 일에 동원되어 신촌 어딘가의 산을 헤매다가 언 밥을 덜덜 떨며 먹은 적도 있다. 솔방울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고, 도처에 껍질까지 벗겨 가 죽어 버린 나무들을 보고 사람보다 더욱 헐벗고 피폐해진 국토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공연습도 자주 했고, 우리 학교의 대피 장소는 기숙사 지하의 석탄도 저장해 두고 아궁이도 있는 데였다.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콧구멍이 새까매졌다. 연습이 아닌 진짜 공습경보가 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집으로 보냈는데 아직도 현저동에 살고 있던 나는 혼자서 집까지 뛰는 동안 도중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맛보곤 했다. 책가방 없이 등교할 수 있는 날도 반드시 휴대해야 하는 게 구급낭이었다. 구급낭 속엔 아주 초라한 구급약과 함께 부상을 당했을 때 지혈을 시킬 수 있는 삼각건이 들어 있었고, 각자의 성명, 주소, 혈액형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삼각건 매는 법도 되풀이해서 교습을 받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게 유효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경, 대판 등이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단 소식은 신문에도 났지만 풍문으로 더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을 일본 당국은 유언비어라는 죄목까지 만들어 놓고 단속을 했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미국이 조선은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