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A] 나는 지금까지 국민학교 동창 중에선 J라는 그 아이 말고는 생각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을 만큼 그 아이한테만 빠져서 지냈다. J가 전학해 오고부터 나의 국민학교 생활은 비로소 밝고 활기찬 것이 되었다. J는 또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워낙 읽을 만한 책이 귀할 때라 동화책 말고도 읽을거리만 있다 하면 학교까지 가지고 와서 읽고는 나한테로 넘겨주었다. 나는 그애를 통해서 교과서 외의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좋은 책에의 갈증도 알게 되었다. 또한 책에의 갈증을 한껏 풀 수 있게 해준 것도 J였다. 5학년 때였다. J는 나에게 도서관에 가면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지금의 조선호텔 건너 쪽이 그때(일제시대)의 시립도서관이었는데, 중학생 이상의 어른들이 들어가는 열람실 말고, 별관에 아동들을 위한 개가식 도서관이 있었다. J가 그걸 알아봤고 그때의 우리들에겐 온갖 동화책이 고루 구비된 그곳은 알리바바의 동굴보다 더 눈부시고 신비한 보고였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보통 두세 권의 책을 독파했고 눈이 피곤해 창밖을 내다보면 늠름한 은행나무의 거목들이 철따라 아름다웠다. J와 나는 그 그늘에서 방금 읽은 책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가. 완전하고 행복한 공감으로 어린 가슴은 동기간 같은 우애와 충일을 맛보았다. 그러나 나의 편협한 소견 때문에 J와 나의 우정은 잠깐 끊기게 됐다. 중학교에 갈 때 J는 경기를 지망하고 나는 숙명을 지망했다. 그때만 해도 숙명은 지방에 많이 알려진 명문이어서 우리 어머니는 나를 데려다 서울의 국민학교에 넣을 때부터 이 아이는 장차 숙명학교에 갈 애로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딴 학교에 대해선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딴 학교에 못 가게 이미 운명 지워졌지만 J는 자유롭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가는 학교를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J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면담한 끝에 경기에 응시하기로 정했고, 우리는 둘 다 합격을 했다. 그애가 경기에 갈 때부터 섭섭했던 나는 합격을 하자 더욱 그애가 으스대는 것 같아 속이 편치 못하다가 드디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절교를 하고 말았다. 곧 후회했지만 우정이 유별났던 만큼 상처도 커서 결국은 화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상급 학교로 헤어졌다. 나는 숙명에서도 그애를 잃은 빈자리를 메워줄 만한 친구를 못 사귀어 늘 외톨이를 면치 못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그 무렵 그애한테서 먼저 편지가 왔다. 나는 즉각 답장을 썼고, 편지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마음을 털어놓은 관계가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일요일엔 만나기도 했지만 만나나 안 만나나 서로가 힘이 되고, 기쁨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 [박완서]우정 [A] 해방 후 J는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용인으로 내려가 국민학교 선생이 됐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3년 수료 정도로도 지방의 국민학교 선생은 가능할 때였다. 시골, 서울로 서로 오가기도 했지만, 변함없이 편지질도 계속했다. 6·25 사변 후 서신 연락이 두절되고 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결혼해서 몇 아이의 어머니가 된 후에도 ‘친구’ 하면 제일 먼저 J가 떠올랐고, J와의 우정이 나의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보석처럼 빛내주고 있음을 느끼고 무한한 감회에 젖곤 했다. 내가 마흔 살이란 좀 뒤늦은 나이에 소설을 써서 문단에 데뷔를 하고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나서였다. 나는 20여 년 만의 J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신문사에서 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나는 흥분해서 당장 만나자고 대강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J는 너무 늙고 초라했다. 앞니가 두 개나 빠진 걸 해 넣지 않고 있어서 할머니처럼 보였고, 손은 거칠고 옷차림은 구질구질했다. 그러나 밝게 웃으면서 자기가 처한 곤경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털어놓았다. 남편이 반신불수로 오래 누워 있는데 정신마저 정상이 아니어서 많이 힘들다는 얘기와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중학교 이상 시키기가 벅차다는 얘기를 담담히 늘어놓았다. 나는 약간 수선을 떨며 그녀에게 불고기를 해 먹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J는 나에게 중학교를 나와 집에서 아버지 시중을 드는 맏딸의 취직을 부탁했다. 별로 발이 넓지 못한 나는 난감했지만 어떻든 알아보마라고 했다. 취직 건으로 J는 그후에도 몇 번 우리집에 왔지만 나는 내 무능함이 창피한 나머지 그녀에게 비관적인 한탄이나 하기 일쑤였다. 그녀의 초조한 태도와 초라한 모습에서 그녀의 곤궁을 눈치챈 우리 식구들은 취직을 못 시켜주더라도 우선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자고들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자존심이 상할 것을 우려해서 그런 의견을 못 들은 척했다. J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을 끊었다. 그리고 여지껏 그녀의 소식을 모른다. 나는 그때 J를 경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했었다. 나도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돈을 주는 걸 삼갔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핑계일 뿐 실상은 내 마음이 인색해서가 아니었을까 목마른 친구에게 물을, 헐벗은 친구에겐 옷을, 궁색한 친구에겐 돈을 우선 주고 보는 게 우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관포管飽의 교우를 동양적인 우정의 이상으로 삼아왔다. 관중管仲이 포숙아飽叔牙에 대해 한 말은 누구나 새겨둘 만한 얘기다. “내가 아직 젊고 가난했을 때 포군과 장사를 같이 한 일이 있는데, 그 이익을 나눌 때 늘 내가 그보다 많이 가졌다. 내가 가난한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한 내 일이 실패해서 되레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도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이나 관리가 되었다가 쫓겨난 일이 있지만 그는 그걸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운수가 트이지 않았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갔다가도 몇 차례나 져서 도망쳤지만 그걸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게 늙은 어머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주신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 알아준 사람은 포군이었다.”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 J를 못 도와준 게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아아 나도 그때 J에게 돈을 주었어야만 했었다. 그때 J는 너무도 궁색했었으니까. — [박완서]우정 [B] 오학년 때였는데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다. 전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이 나하고 짝을 시켰다. 전학해 온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동안 마음이 순한 아이하고 짝을 시키는 게 선생님들의 공통된 버릇이었다. 나는 반에서 존재 없는 아이여서 아무 일에도 뽑힌 적이 없건만 그런 일엔 단골로 뽑혔다. 나는 속으로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 놓고 싫은 눈치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바라는 유일한 기대를 배반할 용기가 없어 그런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성만 일본식으로 갈고 이름은 복순이라는 촌스러운 본명 그대로였다. 생긴 것도 촌스럽고 의복도 남루한 편이었다. 그 애하고 짝이 된 첫 시간에 배운 국어가 도서관에 대한 거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선생님은 너희들도 실제로 도서관을 한번 이용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도서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근면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정직에 대해서 나오면 정직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도덕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가 보다 들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복순이가 다음 일요일 날 같이 도서관에 가 보자고 나를 꼬였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공립도서관의 위치를 잘 들어 두었는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어책에 나온 대로 거기서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빌려 보면 얼마나 신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애는 책 보는 재미에 대해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었다. 그 애에 비해 나는 처녀지와 다름이 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일요일 날 같이 가기로 하고 먼저 그 애 집을 알아 놓기로 했다. 그 애 집은 누상동이었다. 문안에도 그런 집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초가집 추녀가 어찌나 낮게 땅으로 드리웠는지 문자 그대로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게 생긴 집이었다. 평지라 수돗물이 나오는 것만 빼면 우리 집보다 훨씬 못했다. 삼 남매에다 부모님 할머님까지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안돼 보였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은 온종일 침을 흘리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박약아였고, 엄마는 홧김에 그렇게 됐는지 시어머니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명랑한 그 애가 불쌍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 애는 손수 부엌에 들어가 감자 껍질을 몽당숟가락으로 박박 벗기더니 쪄서 나에게 대접했다. 그런 꾸밈없는 태도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나에게도 드디어 동무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 놀 애가 아주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내 우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 준 건 그 애가 처음이었다. 도서관 가는 게 학교 숙제라고 했더니 단박 엄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공일 날 아침, 그 애네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의 길은 나에겐 멀고도 낯설었다. 그 애도 처음이어서 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어 간신히 당도한 곳은 아이들이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게 생긴 건물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 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낼 듯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 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 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府立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 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 열람실은 본관에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 한 별관이었다. 들어가는 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 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 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 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집 서가의 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 촐싹거리기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였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