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A] 그때는 학기초가 사월이었으니까 시험은 삼월에 있었을 텐데도 날씨가 몹시 추웠다. 나는 눈길을 헤치고 서울에 올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두루마기에 털신을 신고 어머니가 친척집에서 얻어온 흰 토끼털 목도리를 했다. 빨간 유리구슬로 눈까지 박힌 예쁜 목도리였다.” — [박완서]시험 준비 #초등학교 #입학시험 [A] 주먹을 쥐고 책상에 앉았던 남자 선생님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내 눈앞에서 주먹을 펴니까 한 주먹에서 하얀 바둑알이 네 개, 또 한 주먹에선 까만 바둑알이 세 개가 나왔다. “모두 몇 개냐” 선생님이 물으셨다. “일곱 개여요.” 얼른 그렇게 대답하면서 속으로 나는 백까지도 셈을 할 줄 아는데 이건 너무 쉽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연필로 그린 그림을 두 장 보여주었다. 한 장의 그림엔 넥타이 맨 신사하고 가방을 든 학생하고 같이 서 있었고 또 한 장의 그림엔 중절모와 학생모가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신사를 가리키며 무슨 모자를 쓰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중절모를 가리키고 나서 선생님이 묻기도 전에 앞질러서 학생모와 학생을 한꺼번에 가리켰다. 나는 시험문제가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떡하든 내가 그 이상 가는 실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는 속으로 선생님이 나를 그 학교에 붙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험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어서 선생님은 또 그림을 한 장 꺼냈다. 예쁜 양옥집이 있고 양옥집 굴뚝에선 연기가 무럭무럭 나와 한쪽으로 나부끼고 있는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엉뚱한 질문을 했다.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냐는 거였다. 그림 속에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이번 문제에서도 뭐든지 단박 알아맞춘 실력을 발휘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얼른 연기가 나부끼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가리켰다. 선생님은 또 미소지었다. 나의 국민학교 입학시험은 그것으로 끝났다. 어머니의 예상문제는 하나도 안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걱정하시던 일, 일본말로 시험을 보면 어떡하나 하는 일도 안 일어났다. 뒷문으로 해서 시험장 밖으로 나오니까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나를 대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면서 시험 잘 쳤냐고 물으신다. “응, 다 맞았어.” 나는 의기양양 그렇게 대답했다. “다 맞았다는 애 붙는 거 못 봤다.” — [박완서]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초등학교 #입학시험 [B] 시험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주소 때문에 머릿속이고 암기력이고 엉망이 된 채 시험 날짜가 됐다. 엄마가 박적골로 데리러 올 때 해 가지고 온 연두색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도 새로 깎고 시험을 치러 갔다. 주소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았다. 바둑알을 네 개와 세 개로 따로 놓고 모두 몇 개냐고 물었고, 신사와 학생이 서 있는 그림과 중절모와 학생모가 있는 그림을 각각 보여 주면서 각자에게 맞는 모자를 골라 보라고 했다. 그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그림을 놓고 지금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불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문제를 세 개 내줬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개밖에 못 맞혔다. 바람이 연기가 나부끼는 반대 방향으로 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봤단 소리에 일단 안심을 하고 나서, 그래도 틀린 문제가 나오자 실망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고 단정을 했으면 그만이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두루마기 자락, 운동장 깃대 맨 꼭대기에 꽂힌 일본 국기 등을 맹렬하게 손가락질하면서 “시방 바람이 어디로 부냐 응, 어디로 불어 시상에, 그것도 모르다니 떨어져 싸다 싸.” 이러면서 분해했다. 운동장이 엄청나게 넓고 주위에 인가가 없었던 매동학교 운동장엔 그날따라 왜 그렇게 바람이 세찼던지. 그날 저녁에 엄마는 오빠를 붙들고도 내가 떨어진 걸 분해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초등학교 #입학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