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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개성시 남산일동(南山一洞)과 남산이동(南山二洞) 영역에 해당하는 동으로, 1993년 12월 남산일동과 남산이동으로 분리되면서 폐동이 되었다. '남산동(南山洞)'이라는 동명은 개성 남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 1945년 봄,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내려와 새로 장만한 남산동 집에 머물다. — 개성의 호수돈여고로 전학을 하고, 숙부네와 농바위고개 밑 남산동에 집을 장만한다. 새 학교에 열흘 쯤 다니다 폐 건강이 나빠져 박적골로 요양을 간다.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의 한 마을로, 박완서의 고향이다. 개성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0km가량 떨어진 벽촌이며 스무 호가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박가와 홍가 두 양반집과, 열일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 있었으나 지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묵송리는 1953년 정전협정 후 개풍군 묵송리로 되었다가 1954년 황해북도 개풍군 묵송리가 되었고, 1958년에 개성시 개풍군 묵송리로 개편된다. ○ 1931년 양력 9월 15일 박적골 아랫말에서 태어나다. — 박적골은 아랫말과 윗말로 나뉘어 있었다. 윗말은 산에 바짝 붙어있었고, 경사가 완만한 밭들이 있는 동산이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위치했다. 아랫말은 인가도 드문드문하고 불규칙했으며 논이 바로 마당가까지 들어와있었다. 면소재지까지 20여리 떨어진 시골이다보니 출생신고가 늦어져 서류상으로는 10월 20일 출생으로 살아왔다. 여덟 살까지 박적골을 벗어나지 않는다. ○ 헌집 허물고 새집을 다시 짓다. — 200년에 걸쳐 대대로 살던 집이 너무 낡아 헐고 다시 짓는다. 새집의 건축 자재나 양식이 헌집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고, 식구가 늘어난 만큼 약간 커졌다 뿐이지 게딱지 엎어 놓은 모양의 낮은 초가집인 것은 여전했다. ○ 시골집 뒤란을 유년의 뜰, 낙원으로 삼아 놀다. — 동산 모양을 한 뒤란에는 앵두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꽃과 나무, 장독대 여러 개가 있었다. 그곳에서 동네 꼬마들과 소꿉장난, 사방치기, 술래잡기를 하고 논다. 한편에는 터줏대감을 모셔놓는 곳인 터줏가리와 옻이 오를까봐 경계하게 되는 옻나무가 있었는데, 두렵고 무서워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열다섯 여름방학, 박적골에서 해방을 맞다. — 전쟁 말기, 총독부의 소개령에 따라 개성으로 내려온다. 숙명여고에서 개성에 위치한 호수돈여고로 전학한다. 전학 후 두어 달 뒤 여름방학 중 해방을 맞는다. ○ 삼촌이 친일파로 몰려 집안이 난장판 되다. —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집안이었음에도 면서기를 지낸 삼촌이 친일파로 몰린다. 낯 모를 청년들이 집안의 문짝을 부수어댔다. 열다섯 나이에 친일파란 얼마나 치욕의 명칭인지 경험하고, 창씨하지 않은 문패를 집어들며 뜻하지 않은 구원도 얻는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제2차 세계대전 중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이 소개령(疏開令)을 내림으로 인해 고향 박적골로 피난가게 된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1944년 겨울방학을 맞이한 '나'가 고향 박적골로 돌아가는데,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당시 고향 사정이 매우 흉흉하다.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군 삼봉리와 동창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해발고도 288m로, 바위가 많이 드러나 있어 형세가 웅장하다. 고려 말 충신 최영과 그의 가족들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최영을 주신으로 하는 도당굿이 행해졌던 곳이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무당들에 의해 으뜸가는 성지(聖地)로 여겨져 굿이 벌어진다. ○ 할머니를 따라 딱 한 번 덕물산 굿을 보러 가다. —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간 큰 굿이었다. 작두를 타는 무당은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나'는 덕물산에서 행해지는 굿에 참여하면서 친밀감과 더불어 외경심을 느낀다.
황해북도 개풍군 광답리에 있는 고개로, 박적골에서 개성역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네 개의 고개 중 가장 길다. 일반적인 고개라기보다 산의 능선을 타고 한없이 가야 하는 완만한 고개이다. 산문 「내가 잃은 동산」에 따르면 개성에서 박적골로 돌아올 때 긴등고개를 다 넘고 나면 마을이 보였다고 하므로 네 개의 고개 중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고개가 긴등고개일 것으로 보인다. ○ 1938년 봄, 어머니를 따라 고개 네 개를 넘어 개성으로 향하다. — 시골에서 개성까지 가려면 네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중 가장 긴 고개는 긴등고개, 가장 가파른 고개는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고개였다. 농바위고개 앞에 버티고 선 산은 고만고만한 동네 뒷산이 아닌 용수산이라는 이름 붙은 산이었다. 긴등고개는 고개라기보다는 산의 능선을 타고 한없이 가야 하는 완만하고 지루한 고개였다.
황해북도 개성시 용산동의 동남쪽 개풍군 고남리 양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원 남산동 지역과의 경계에 장롱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박적골에서 개성역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네 개의 고개 중 마지막 고개이며 가장 가파른 고개이다. 농바위고개 앞에는 용수산이 버티고 섰고, 이 농바위고개를 넘으면 개성역이 있는 송도였다. ○ 1938년 봄, 어머니를 따라 고개 네 개를 넘어 개성으로 향하다. — 시골에서 개성까지 가려면 네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중 가장 긴 고개는 긴등고개, 가장 가파른 고개는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고개였다. 농바위고개 앞에 버티고 선 산은 고만고만한 동네 뒷산이 아닌 용수산이라는 이름 붙은 산이었다. 긴등고개는 고개라기보다는 산의 능선을 타고 한없이 가야 하는 완만하고 지루한 고개였다. ○ 장편소설 『미망』 — 『미망』에서는 '장롱같이 생긴 바위들이 세간짐을 한 바리 부려놓은 것처럼 우뚝우뚝 서 있고 그 사이에서 달고도 시린 약수가 샘솟'으며, '다리가 아프든 안 아프든 잠깐 쉬면서 개성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맞춤한 장소'라고 묘사된다. — 아버지 재득을 매장한 손태남은 농바위고개에 올라 농바위 사이에서 솟는 샘물에 세수를 하고 송도를 내려다본다. 재득은 막벌이로 모은 품삯을 손태남에게 남겼다.
개성직할시 개성시 승전동과 개풍군 고남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 178m로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개성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고도 한다. 남쪽 기슭엔 고려 3대 왕인 정종의 무덤과 20대 왕인 신종의 무덤이 있다. ○ 1938년 봄, 어머니를 따라 고개 네 개를 넘어 개성으로 향하다. — 시골에서 개성까지 가려면 네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중 가장 긴 고개는 긴등고개, 가장 가파른 고개는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고개였다. 농바위고개 앞에 버티고 선 산은 고만고만한 동네 뒷산이 아닌 용수산이라는 이름 붙은 산이었다. 긴등고개는 고개라기보다는 산의 능선을 타고 한없이 가야 하는 완만하고 지루한 고개였다. ○ 장편소설 『미망』 — 『미망』에서는 샛골에서 개성 성내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으로, 어린 전처만은 돈을 벌기 위해 샛골을 떠나 용수산에 올라 생전 처음으로 개성 시가지를 내려다보았고 샛골땅을 다 살 만큼 돈을 벌기 전엔 용수산을 다시 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전처만은 추후 어린 손녀 전태임을 데리고 '싱아'가 많다는 용수산에 함께 오른다. '싱아'는 박완서의 고향 회상 시 자주 등장하는 나물이다. — 동해랑 식구들은 우물에 빠져 자살한 머릿방아씨를 용수산 기슭에 가매장한다. 전처만은 상인의 길에 뛰어들겠다고 다짐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며느리의 무덤을 찾는다.
개성시 역전동에 위치한 평부선의 철도역으로, 일제강점기에 경의선을 처음 부설할 당시부터 영업을 개시했던 유서깊은 역이다. 분단 직후에는 삼팔선이 개성역 북쪽을 지나며 대한민국 관할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 설정에 의해 북한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경의선을 개성역까지 연장하려던 계획이 있었으나,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무기한 중단되었다. ○ 1938년 봄, 개성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다. — 개성 시내(송도)에 도착하여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개성역으로 향한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역사에서 어머니를 놓칠까 봐 겁을 먹었다. 어머니와 함께 "유리창이 많이 달린 엄청나게 큰 구렁이 같은 기차"에 올라탄다. ○ 장편소설 『미망』 — 『미망』에서 이종상은 개성역에서 하차해 집으로 돌아간다. — 전태임과 이경우가 서울에서 돌아온 이여란을 마중하러 나와 있는 곳이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나'의 고향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는 네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며 거리로는 이십 리(약 7.8km)이다. — '나'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할머니와 큰숙부 내외가 개성역으로 마중하러 나온다. — 개성역 코앞에 숙부네 상점이 있었다.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반반씩 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띄는 장소로, 현저동과는 딴 세상처럼 느껴져 '나'의 마음을 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338.2m로 서울시를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 중 하나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인왕산'이라는 명칭은 인왕사라는 불교사찰이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박완서 소설에서 이곳은 '뒷동산'이라고 불리며 서울의 도시 풍경과 비교되는 자연 그 자체로 회상되고는 한다. ○ 인왕산 동쪽 자락을 넘어 초등학교에 다니다. — 6년 간 넘어 다닌 길이지만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암벽산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서울 아이들이 먹는 아카시아 꽃은 비릿하기만 해, 고향 뒷동산의 싱아 생각만 간절해졌다. 그래도 여름엔 답답한 셋방을 벗어나 산에 오르고, 장마가 끝난 후엔 골짜기로 흐르는 맑은 물에서 빨래를 하기도 했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나'가 어머니에게 동전을 얻어내어 구멍가게에 드나드는 것 때문에 오빠에게 야단을 맞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 문밖인 현저동에서 문안에 있는 매동국민학교로 가기 위하여 '나'는 인왕산 등성이를 넘어다닌다. 독립문이 있는 번화가 쪽과는 반대 방향인 사직공원으로 넘어가는 등성이이다. 「엄마의 말뚝 1」에서는 인왕산보다 수목이 우거지고 사람의 왕래가 적어 무섭게 느껴지는 길로 묘사된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어린 '나'가 현저동 집에서 매동국민학교로 등교할 때 넘어야 하는 산이다. 쑥 하나 돋아나지 않았으며 바위가 부스러진 것처럼 메마른 흙에선 겨우 아카시아가 악착같이 자라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인 선바위 밑에 위치한 신당으로,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신을 모시고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바위(禪岩)'라는 명칭은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듯한 형상에서 유래하였다. 이 밖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자식 낳기를 바라는 사람이 인왕산 선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이 선바위 아래에 국사당이 있다. 박완서 소설에서 '굿당'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 인왕산 국사당을 드나들며 이중생활을 하다. — 동무들과 굿 구경을 하고 떡과 전, 색사탕 같은 것을 얻어먹는 것이 취미이자 심심한 날의 일탈이었다. 그러나 곧 어머니께 들키고 야단을 맞는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법정동이다. 1911년 4월 1일 경성부 서부 모화현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경성부 현저동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 구역이 확장되고 동명을 일제식으로 바꿀 때 현저정이 되었다(조선총독부령 제8호, 경기도고시 제 32호). 1943년 6월 10일에 구(區)제도를 실시하면서(조선총독부령 제163호) 서대문구 현저정이 되었다.광복 후 1946년 9월 28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되어 서울시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서울시헌장, 미군정법령 제106호) 서대문구 현저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저(峴底)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인왕산과 안산이 이어지는 무악현의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다만 1975년 의주로(통일로) 동쪽인 동시에 서대문형무소 맞은편에 위치한 현저동 일부 지역(현저동 46, 48)이 종로구로 편입되면서 무악동이라는 동명이 붙었다. 따라서 박완서가 살았던 시절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은 현재 서울 종로구 무악동인 셈이다. ○ 인왕산 기슭 산동네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하다. — 어머니는 인왕산 밑, 눈에 띄게 허름한 초가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경사진 산비탈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을 지나며 집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 신문을 안집 마루까지 갖다놓는 심부름을 하며, 신문 읽는 즐거움을 탐닉하다. — 시골집에서 할머니에게 한글을 배우긴 했지만, 부호를 연결해서 뜻이 있는 말이 된 것을 해독한 경험은 신문을 통해서였다. 딸이 저절로 한글을 깨쳤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몰래 신문을 읽어 온 것을 꾸짖지 않고 도리어 딸의 총명함을 남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경성역에서 현저동 꼭대기 집까지 가는 길 중간에 전찻길이 있지만 어머니와 '나'는 지게꾼에게 짐을 맡기고 걸어 이동한다. 큰 길을 따라 걷다가 전찻길이 끝나는 데서부터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이 골목길은 꼬불꼬불하고 복잡하며 몹시 험하다. — 먼저 상경했던 어머니와 오빠는 당시 서울 문밖인 현저동 꼭대기의 높은 축대 위 초가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대문 밖은 평탄한 골목길이 아니라 인왕산으로 통하는 오르막길에서 뻗은 좁은 막다른 길이며 사람이 다니는 길 밖은 곧 낭떠러지이다. 전망이 좋은 집이다. — '나'는 어머니로부터 동전을 얻어내어 동네 구멍가게에서 알사탕, 박하사탕, 캐러멜 등 군것질을 사먹는다. — 대문 밖 낭떠러지 위에는 평평한 땅이 있다. 어린 '나'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할 때면 땅에다가 신여성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하면서 논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이모집까지 함께 가자는 '김순덕'의 부탁에 '하진'은 현저동 꼭대기 선바위에 있다는 '김순덕'의 이모집까지 동행한다. — '하진'의 현저동 집 우물가에서는 영천부터 독립문까지의 큰길이 굽어보이나 후퇴령이 내린 이후로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눈이 내리자 들뜬 '혜순'이 붉은 저고리를 차려 입고 기분 전환을 하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된다. 인민군들은 집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와 '하열'의 상태를 눈여겨보고 돌아간다. 보위군관을 비롯한 그들 인민군은 이후로도 종종 집을 방문한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개성역에서 현저동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와 '나'는 짐을 지게꾼에게 맡기고 걸어 올라간다. — 현저동 집을 찾아가는 길은 복잡하였다. 네 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하였다.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오르다가 다시 첫 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 비켜선 층층대 위에야 초가집이었다. 어머니는 이 곳을 "서울의 문 밖"이라고 칭한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현저동 46번지의 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라는 서술이 있다. ○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1·4후퇴 시기 오빠의 부상으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한 '나'의 가족은 현저동의 산꼭대기에 있는 초가집을 임시 거처로 삼아 생활한다. 임시로 살고 있던 고지대 집 앞에는 물이 충충한 우물이 있다. 겨울에도 김이 나는 것을 보고 '나'는 여름에도 마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후에 '나'는 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자아이 '정희'와 만나게 된다. — '정희'는 현저동 한길가 기와집에 살고 있다. 현저동 평지에 위치한 이 기와집은 원래 '정희'의 큰아버지 집이다. 할머니가 큰아버지와 함께 피난을 가며 '정희' 가족이 이 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 '나'가 머물고 있는 산의 비탈에는 하꼬방들이 붙어 있다. '나'와 올케는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람도 없고 문단속도 허술한 집들을 찾아 식량을 훔친다. — '정희'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인민위원회 사무소가 차려진다. 그 옆으로는 인민군 숙소가 밀집되어 임시 병영의 구실을 한다. '나'는 인민군 마부인 신씨로부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고 국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기 전까지 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