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박적골

기본 이미지
  • 관련 연도
    1931 ~ 1938 , 1945
  • 관련 지역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 연관검색어
    유년시절, 가족관계, 장편소설, 산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의 한 마을로, 박완서의 고향이다. 개성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0km가량 떨어진 벽촌이며 스무 호가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박가와 홍가 두 양반집과, 열일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 있었으나 지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묵송리는 1953년 정전협정 후 개풍군 묵송리로 되었다가 1954년 황해북도 개풍군 묵송리가 되었고, 1958년에 개성시 개풍군 묵송리로 개편된다. ○ 1931년 양력 9월 15일 박적골 아랫말에서 태어나다. — 박적골은 아랫말과 윗말로 나뉘어 있었다. 윗말은 산에 바짝 붙어있었고, 경사가 완만한 밭들이 있는 동산이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위치했다. 아랫말은 인가도 드문드문하고 불규칙했으며 논이 바로 마당가까지 들어와있었다. 면소재지까지 20여리 떨어진 시골이다보니 출생신고가 늦어져 서류상으로는 10월 20일 출생으로 살아왔다. 여덟 살까지 박적골을 벗어나지 않는다. ○ 헌집 허물고 새집을 다시 짓다. — 200년에 걸쳐 대대로 살던 집이 너무 낡아 헐고 다시 짓는다. 새집의 건축 자재나 양식이 헌집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고, 식구가 늘어난 만큼 약간 커졌다 뿐이지 게딱지 엎어 놓은 모양의 낮은 초가집인 것은 여전했다. ○ 시골집 뒤란을 유년의 뜰, 낙원으로 삼아 놀다. — 동산 모양을 한 뒤란에는 앵두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꽃과 나무, 장독대 여러 개가 있었다. 그곳에서 동네 꼬마들과 소꿉장난, 사방치기, 술래잡기를 하고 논다. 한편에는 터줏대감을 모셔놓는 곳인 터줏가리와 옻이 오를까봐 경계하게 되는 옻나무가 있었는데, 두렵고 무서워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열다섯 여름방학, 박적골에서 해방을 맞다. — 전쟁 말기, 총독부의 소개령에 따라 개성으로 내려온다. 숙명여고에서 개성에 위치한 호수돈여고로 전학한다. 전학 후 두어 달 뒤 여름방학 중 해방을 맞는다. ○ 삼촌이 친일파로 몰려 집안이 난장판 되다. —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집안이었음에도 면서기를 지낸 삼촌이 친일파로 몰린다. 낯 모를 청년들이 집안의 문짝을 부수어댔다. 열다섯 나이에 친일파란 얼마나 치욕의 명칭인지 경험하고, 창씨하지 않은 문패를 집어들며 뜻하지 않은 구원도 얻는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제2차 세계대전 중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이 소개령(疏開令)을 내림으로 인해 고향 박적골로 피난가게 된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1944년 겨울방학을 맞이한 '나'가 고향 박적골로 돌아가는데,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당시 고향 사정이 매우 흉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