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박완서
1931 ~ 1937
내 유년의 뜰은 정확하게 말하면 안채 뒤에 있는 뒤란이었다. 내 뒤란은 아늑하고도 거칠 것이 없었다. 한겨울만 빼고는 늘 꽃이 피고 졌다. 뒤란에 피는 꽃들은 아무도 씨 뿌리거나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아무렇게나 피는 꽃들이었고, 나는 한 번도 그것들이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우연히 던져진 환경의 일부였고, 더 좋은 세상도 더 나쁜 세상도 상상할 수 없는 충족된 나의 온 세상이었다. [박완서] 마음 붙일 곳
학생 박완서
1938 ~ 1950
여고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인왕산 자락을 넘어서 통학하는 일을 면하고 전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의 헐벗은 산에 정을 붙이지 못했지만 육 년을 한결같이 걸어 다닌 산길이었다. 사월의 벚꽃, 오월의 아카시아, 겨울의 설경 등이 그립게 회상되고 서울 아이들이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혜택받은 통학 길이었다고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 년 동안을 줄창 혼자 다녔다는 것은 내 성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은 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지금도 걸어가건 무엇을 타고 가건 간에 어디를 가고 오는 길에 누가 옆에 있으면 그가 무척 친해서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인 것만 못하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주부 박완서
1950 ~ 1970
그는 또 복청다리 밑에서 장마가 끝나고 나면 얼마나 많은 미꾸라지를 건져냈던가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함석으로 된 석유통으로 하나 가득 미꾸라지를 건져냈다고 했지만 어째 허풍이 지나친 것 같아 나는 그냥 웃으면서 들었다. 내가 숙명여고에 입학했을 무렵만 해도 복청다리 밑은 거지나 넝마주이들의 소굴이었고, 그 근처의 상가엔 상두 도가가 많아 무섭고, 불결한 인상밖에 남은 게 없는데 그는 그런 유쾌한 추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얘기에 밤 깊은 줄 모르다가 그가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부부란 동시대인이라는 데 각별한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 손을 잡고 ‘주악다리 할먼네’로 나들이 갈 때 그는 그 개천 속에서 미꾸라지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새침한 계집애와 개구쟁이 소년은 마주보았을까? 말았을까? 동시대인이란 인연이 부모자식 간의 인연보다 훨씬 신비롭게 생각됐다. [박완서] 삶의 가을과 계절의 가을의 만남
작가 박완서
1970 ~ 2011
나는 요새 기억의 도움 없이 현실을 바로 보고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새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을 고통스럽게 키우고 있다. 기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기억이 하찮으면 나도 하찮다. 나는 기억의 다발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족하지 구태여 특정 기억으로 착시나 미화의 방편을 삼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그런 뜻으로 내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기억들을 생으로 내보인 것들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두 편이다. 독자 앞에 이게 다라고 몽땅 드러내 보임으로써 더는 우려먹지 못하게 되길 스스로에게 바라고 있다. 내가 툭하면 써먹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긴 시골 체험도 실은 텃밭 푸성귀에 맺힌 아침이슬에 함초롬히 종아릴 적신 기억일 뿐 농사일로 땀흘린 기억은 결여된 아니꼽고 유치한 것이다. 이 나이에 아직도,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극복하지 못한 과제이다. [박완서] 시골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