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30건
『삼국지』(진수, 280~289)는 진나라 학자인 진수가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 역사서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수호지』, 『삼국지』와 같은 이야기마저 수준에 맞게 각색하여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유년시절 박완서가 세상에서 어머니만큼 『삼국지』를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느낄 만큼 어머니의 『삼국지』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쳤다. 위 소설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며 "옜다 조조야, 칼 받아라"라고 했을 때 어머니 손끝에서 번쩍이던 바늘 빛이 장검 못지 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다고 기술한다.
박완서보다 열 살 많은 오빠 박종서는 어린 시절 박완서로 하여금 책 읽기를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의용군으로 차출되었다가 탈출하는데, 이때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8개월 후인 1951년 7월 사망하였다.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미아리 공동묘지 뒤편 밭머리에 매장하였으며 삼일장도 치르지 못 하였다고 한다.
박완서의 올케는 한국전쟁 중 박완서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이끌었으며 휴전 이후에는 작은 숙부의 도움으로 홀로 포목점 운영하였다.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 자전소설에 따르면 그는 1952년 동두천 기지촌에서 헌 옷 장사를, 1953년 동대문에 가게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소설가이며 전남 목포 출생이다. 숙명고등여학교 졸업 후 1926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추석전후」가 등단작품이지만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32년 단편 「하수도공사」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장편 「백화」(1932), 「북국의 여명」(1933)을 비롯, 단편 「비탈」(1933), 「홍수전후」(1934),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 빈궁을 소재로 한 이념과 사상성을 보여준 작품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특히 작가는 계급적 대립관계의 모순을 포착하여 궁핍의 원인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며 동시에 성급하고 도식적인 저항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섬세하면서 박진감 있는 문장을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박완서와 함께 숙명고등여학교 출신이며, “원래 박화성 씨가 저를 좋아하셨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박화성의 맏며느리인 이규희(1937~) 또한 소설가로서 박완서와 마음을 나누는 또래 문인이었다.
소설가이며 충남 아산 출생이다. 대전사범학교, 이화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5년 『동아일보』 특별 공모에 장편소설 『속솔이뜸의 댕이』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사상과 계몽, 이념의 편견에서 벗어나 농촌과 농민의 실상을 리얼하게 파헤치는 소설들로 주목 받았다. 1988년 『그리움이 우리를 보듬어 올 때』로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여성문학가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2010년 소설집 『그 여자의 뜀박질은 끝나지 않았다』를 출간하였다. 2023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숙명여고 선배이자 소설가인 박화성의 맏며느리로 박완서와는 데뷔 전부터 연을 맺었다. “가장 흉허물 없이 만나”는 사이로 꼽으며, 데뷔작 『속솔이뜸의 댕이』에 대해 아주 좋은 소설이라며 칭찬한 바있다.
소설가이며 호는 담인(淡人)이다. 함남 단천 출생이다. 1930년 일본에서 유치진‧김동원 등과 함께 학생극예술좌에 참가했고, 1931년 삼천리사에 입사했으며, 1934년 제2차 카프검거 때 수감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공군종군작가단인 창공구락부에 참가하였고, 한국여류문학인협회장,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서울시 문화상(1958), 3‧1문화상(1983) 등을 수상하였다. 1931년 『삼천리』에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1934년 카프 제2차검거사건 이전까지는 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적인 작품들을, 출옥 후부터는 사상문제를 벗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지식인들의 허무를 주로 작품에서 다뤘다. 소설가 최정희·시인 김동환의 두 딸인 김지원(1942~2013)과 김채원(1946~) 역시 문학 활동을 하였다. 특히 둘째 딸 김채원은 『나목』으로 등단한 직후 어머니의 마포 아파트로 인사차 찾아왔던 젊은 박완서를 기억한다. 최정희와 박완서의 인연은 소설가 손소희(1917~1986)의 소개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이며 박완서의 숙명고등여학교 동창(39회)으로, 2002년 ‘자랑스러운 숙명인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신화의 단애」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박완서와 같이 서울대 문리과를 입학했으며, 언어학과를 졸업하였다. 박완서에 따르면 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학교 뒤 기숙사 2층의 허술한 다다미방에서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으며, 박완서는 한말숙이 “보고 싶을 때, 마음이 답답할 때, 힘이 모자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친구라고 밝힌 바 있다.
박완서의 아버지 박영노는 잔병 한 번 치른 일 없는 건강체였으나 맹장염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픈 와중에도 어린 딸 박완서를 예뻐하고 사랑하였다. 아버지에 관하여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밝다」 등 자전소설에서 언급된다.
박완서의 어머니 홍기숙은 주체적이고 교육열이 높은 신여성이었다. 특히 박완서는 여성의 권리를 중시한 어머니를 존경하였다. 1934년 남편 사망 후 아들 박종서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1938년 만 일곱 세이던 박완서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생계를 책임졌다. 1991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