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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시내암·나관중, 14C)는 중국 명나라 시기의 장편무협소설이다. 원말명초(元末明初) 혹은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의 시내암(施耐庵)이 쓰고, 나관중(羅貫中)이 다듬은 중국 4대 기서(奇書) 중의 하나이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수호지』, 『삼국지』와 같은 이야기마저 수준에 맞게 각색하여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무정』(이광수, 1917)은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로,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18년 신문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박완서는 유년시절에 처음으로 들은 작가의 이름이 이광수였다고 말하면서, 삼촌과 삼촌의 친구들이 이광수의 『무정』이나 『흙』을 보물처럼 아끼며 돌려보던 일을 회상한 바 있다.
서울음대 교수이자 소설가이다. 1993년 「안해」로 『조선중앙일보』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대표작으로 소설 『사십 년』(1948) 등이 있다. 1949년 박완서의 숙명고등여학교 5학년(고2) 시절 문과 반 담임이었으며,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완서의 소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에 등장하는 ‘송사묵’ 선생이 그를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완서는 박노갑의 창작 지도 덕분에 자신이 문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며, “그 후 읽거나 들은 어떤 문학 이론도 그만큼 과장이나 무리 없이 진솔하게 문학을 통찰한 건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창작 시간에 선생님한테 칭찬 받은 기억”이 “사십의 나이에 소설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박완서가 말한 바 있듯이 박노갑이 담임을 맡았던 한 반에서 “소설가 두 명(한말숙, 박완서), 시인 두 명(박명성, 김양식)이 탄생”한 것이 흥미롭다.
화가이다. 1914년 강원도 양구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가난한 형편에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8세 되던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한 후 수채화와 유화로 여러 차례 입선하였고,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었다.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부두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화가로서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유화를 그리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생활상을 표현하려했기에 그는 오늘 날에도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높이 평가 받는다. 박완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며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약 20년 후, 박완서의 등단작인 『나목』으로 새롭게 씌어진다.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이며 1936년 경상남도 진영에서 태어났다.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2년 문예지 『현대문학』에 평론 「문학사방법론 서설」과 「역사와 비평」이 추천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8년 서울대학교 교양학부 전임강사가 되었다. 1976년 논문 「한국 근대문예비평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임용된다. 프로문학비평에 대한 실증주의적 연구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문학에 있어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이식문화론의 정신사적 극복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작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한 비평적 전기 연구를 축적한 점도 주목받는다. 김윤식은 1981년 제5회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으로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2」를 적극 추천하였으며 선정 이유 또한 직접 썼다. 박완서에 대한 평론으로는 「박완서론 - 망설임없는 의식」(『우리문학의 넓이와 깊이』, 서래헌, 1979), 「박완서와 박수근 - 나목에 이른 길」(『낯선 신을 찾아서』, 일지사, 1988) 등이 있다. 또한 박완서의 기일 2주기에 맞춰 『내가 읽은 박완서』(문학동네, 2013)를 펴내었다.
소설가이며 1926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한국전쟁기 남편과 아들을 잃은 뒤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55년 소설 「계산」이, 1956년 소설 「흑흑백백」이 각각 『현대문학』에 추천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자기 체험과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형상화하며 역사를 정면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한 소설가이다.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장편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에 걸친 집필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약 1세기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다양한 인간들의 욕망과 갈등을 총체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생전 박경리와 박완서는 특별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완서가 계간지 『한국문학』으로부터 박경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고, 박경리가 여기에 답장을 하면서 둘 사이의 인연이 싹 튼다(참조: 장영은,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민음사, 2023). 한편 박완서는 박경리와의 인연을 수필 「치악산과 면장갑」(『한 길 사람 속』, 작가정신, 1995)에서 소개한 바 있다.
『장화홍련전』은 18~19세기 초 창작된 가정윤리 소설로, 국문본과 한문본이 전한다. 한문본은 1785년(영조 34)에 지어졌는데 이것이 국문본의 원본으로 보이며 작자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국문본은 한문본을 토대로 하되 장화와 홍련의 환생 이후 이야기를 추가한 것이다. 유년시절 박완서는 이를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여러 번 전해들었다. 특히 어머니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새맛'이 나 어린 박완서는 이야기 듣기를 즐겼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따르면 박완서는 어머니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고 기억한다. 궁핍했던 서울 현저동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린 박완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박씨부인전』(작자미상, 17C 후반)은 『박씨전(朴氏傳)』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숙종 때인 17C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창작 시기 및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고전소설이다. 이 소설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여성 인물 박씨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군담소설이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수호지』, 『삼국지』와 같은 이야기마저 수준에 맞게 각색하여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박완서는 그 중에서 『박씨부인전』을 가장 좋아하였다.
『사씨남정기』(김만중, 17C 후반)는 『남정기(南征記)』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숙종 때인 17C 후반에 문신이자 소설가인 서포 김만중이 한글로 지은 고전소설이다. 소설 속 사씨부인은 인현왕후에, 유한림은 숙종에, 교씨는 장희빈에 각각 대비시켜 처첩갈등을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소설이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수호지』, 『삼국지』와 같은 이야기마저 수준에 맞게 각색하여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구운몽』(김만중, 17C 후반)은 조선시대 숙종 때인 17C 후반 김시습이 귀양지에서 지은 고전소설로, 몽유 소설(夢遊小說)과 영웅소설의 특징이 변형 및 결합된 양상을 띤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소설의 구도와 배경으로 미루어 보아 김만중이 숙종 15년 남해로 귀양갔을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수호지』, 『삼국지』와 같은 이야기마저 수준에 맞게 각색하여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