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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간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는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굿이 들었을 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 부스러기가 늘 널려 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 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 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나에겐 굿 구경은 신기한 게 아니라 익숙한 거였다. 박적골은 유명한 무속의 본산인 덕물산德物山과 멀지 않았다.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거기서 삼 년에 한 번씩 타지방 무당까지 모여서 하는 큰굿은 유명했다. 그런 전국적인 굿 말고도 무당 집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이니까 개성 부자들이 재수를 비는 크고 작은 굿이 그치지 않았다. [중략] 큰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 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 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 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 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 만한 것이 전무한 긴긴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그러나 바로 그런 쏠쏠한 실속 때문에 굿 구경 또한 금지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름 교복은 흰 반소매 윗도리에 어깨허리가 달린 청색 치마였는데, 어느 날 그 치마 앞에다 굿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게 탄로가 나고 말았다. 색사탕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무소 앞마당에서 미끄럼 탄 것을 적발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나서, 이놈의 동네를 언제 면하냐는, 그 판에 박은 한탄을 또 했다. 엄마는 아마 맹자의 엄마처럼 당장 여봐란듯이 그 동네를 뜨고 싶었겠지만 우린 맹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 돈이 없었고, 나는 맹자보다 똑똑하게 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었고 곧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초등학교 [C] 서울에 친척이 꽤 여러 군데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성공해서 여봐란 듯이 살게 될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아무도 안 찾아다니고 견딜 거라는 매서운 결심을 누차 우리 앞에서 다짐한 바까지 있는 엄마가 여기저기로 친척댁을 수소문해 나서기 시작했다. 문안이라도 현저동에서 가까운 문안에 사는 친척을 남대문입납으로 찾아나서는 엄마를 효자 오빠까지도 참 엄마도 주책이셔, 하면서 쓴웃음 짓고 외면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친척을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고, 내 기류계는 그 댁으로 옮겨졌다. 그 댁은 사직동에 있었고 내가 가야할 학교는 매동학교였다. 엄마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문안에서 친척을 찾아낸 엄마의 요행과 나의 운을 두고두고 되뇌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전차를 안 타고 갈 수 있는 학교라는 건 나에게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전차를 안 타고 걸어다니려면 하다못해 독립문을 지나 당당히 문안으로 입성을 하는 기분이라도 맛보고 싶은 데 매동학교는 어떻게 된 게 인왕산 줄기가 흘러내린 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를 닮아 어느 만큼은 문 밖이라는 데 서울로부터의 소외 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문 안 학교 간다는 데 서울 구경에의 기대를 더 많이 걸고 있었다. 그런데 번화가 쪽과는 반대 방향의 산꼭대기 쪽으로 뚫린 문 안 가는 길은 실망스럽다 못해 미덥지 못하기까지 했다. — [박완서]엄마의 말뚝 1 #초등학교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시. 동쪽은 장단군, 서 · 남 · 북쪽은 개풍군과 접하고 있다. 고려의 옛 도읍지로 문화유적이 많은 역사도시이며,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78㎞ 떨어져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완서의 장편소설 『미망』(1985.3.~1990.5.)은 개성 지방 거상 일가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으로, 사실적인 풍속 묘사가 두드러진다.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의 한 마을로, 박완서의 고향이다. 개성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0km가량 떨어진 벽촌이며 스무 호가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박가와 홍가 두 양반집과, 열일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 있었으나 지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묵송리는 1953년 정전협정 후 개풍군 묵송리로 되었다가 1954년 황해북도 개풍군 묵송리가 되었고, 1958년에 개성시 개풍군 묵송리로 개편된다. ○ 1931년 양력 9월 15일 박적골 아랫말에서 태어나다. — 박적골은 아랫말과 윗말로 나뉘어 있었다. 윗말은 산에 바짝 붙어있었고, 경사가 완만한 밭들이 있는 동산이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위치했다. 아랫말은 인가도 드문드문하고 불규칙했으며 논이 바로 마당가까지 들어와있었다. 면소재지까지 20여리 떨어진 시골이다보니 출생신고가 늦어져 서류상으로는 10월 20일 출생으로 살아왔다. 여덟 살까지 박적골을 벗어나지 않는다. ○ 헌집 허물고 새집을 다시 짓다. — 200년에 걸쳐 대대로 살던 집이 너무 낡아 헐고 다시 짓는다. 새집의 건축 자재나 양식이 헌집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고, 식구가 늘어난 만큼 약간 커졌다 뿐이지 게딱지 엎어 놓은 모양의 낮은 초가집인 것은 여전했다. ○ 시골집 뒤란을 유년의 뜰, 낙원으로 삼아 놀다. — 동산 모양을 한 뒤란에는 앵두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꽃과 나무, 장독대 여러 개가 있었다. 그곳에서 동네 꼬마들과 소꿉장난, 사방치기, 술래잡기를 하고 논다. 한편에는 터줏대감을 모셔놓는 곳인 터줏가리와 옻이 오를까봐 경계하게 되는 옻나무가 있었는데, 두렵고 무서워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열다섯 여름방학, 박적골에서 해방을 맞다. — 전쟁 말기, 총독부의 소개령에 따라 개성으로 내려온다. 숙명여고에서 개성에 위치한 호수돈여고로 전학한다. 전학 후 두어 달 뒤 여름방학 중 해방을 맞는다. ○ 삼촌이 친일파로 몰려 집안이 난장판 되다. —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집안이었음에도 면서기를 지낸 삼촌이 친일파로 몰린다. 낯 모를 청년들이 집안의 문짝을 부수어댔다. 열다섯 나이에 친일파란 얼마나 치욕의 명칭인지 경험하고, 창씨하지 않은 문패를 집어들며 뜻하지 않은 구원도 얻는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제2차 세계대전 중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이 소개령(疏開令)을 내림으로 인해 고향 박적골로 피난가게 된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1944년 겨울방학을 맞이한 '나'가 고향 박적골로 돌아가는데,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당시 고향 사정이 매우 흉흉하다.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군 삼봉리와 동창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해발고도 288m로, 바위가 많이 드러나 있어 형세가 웅장하다. 고려 말 충신 최영과 그의 가족들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최영을 주신으로 하는 도당굿이 행해졌던 곳이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무당들에 의해 으뜸가는 성지(聖地)로 여겨져 굿이 벌어진다. ○ 할머니를 따라 딱 한 번 덕물산 굿을 보러 가다. —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간 큰 굿이었다. 작두를 타는 무당은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나'는 덕물산에서 행해지는 굿에 참여하면서 친밀감과 더불어 외경심을 느낀다.
2010년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된 박완서의 자전적 단편소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 빈 자리를 채워주려 노력한 집안 어른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희생을 불사한 어머니. 이후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른 후, 강한 증언의 욕망에 사로잡혀 글을 쓰게 된 사연. 거짓말처럼 연이어 떠난 남편과 아들에 대한 기록까지. 석양 지는 황혼에 돌아보는 작가의 담담한 고백을 담아낸 자전소설이다.
1989년 11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교하댁의 집에 대한 남다른 욕망, 그리고 가를 잇고자 하는 맹목적 집념을 식민지 시기 파주 교하부터 해방기와 한국전쟁기의 청량리 밖 변두리, 1980년대 서울의 아파트에 이르는 한국의 현대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시공간을 무대로 서사화하였다. 파주 교하 일대에 대한 서술은 『목마른 계절』과, 식민지 시기 시골에서 경성으로 상경하는 일화는 「엄마의 말뚝 1」과, 전통 한옥 대신 하꼬방에서 집장사를 하는 일화는 『그 남자네 집』과 닮아있다. 박완서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깃거리들이 집약된 소설이다.
1990년 문학사상사에서 전 3권으로 출간된 박완서의 장편소설이다. 출간 전 1985년 3월호부터 1988년 9월호까지, 7개월의 연재 중단 후 1989년 5월호부터 1990년 5월호까지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다. 2004년 세계사에서는 『꿈엔들 잊힐리야』(2004)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조선 말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 전쟁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역사적 시간을 배경으로, 개성 지방의 한 거상 일가의 5대에 걸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완서 자신의 실제 고향을 무대로 삼아 사실적인 풍속 묘사가 두드러진다. 1990년 대한민국문학상과 1991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1996년 MBC에서 소원영 원출, 최불암, 채시라, 김상중 주연으로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됐다.
『희·무정』(빅토르 위고, 1928)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신바 코슌(榛葉紅春)가 아동용으로 번역해 1928년 동경의 요넨사(ヨウネン社)에서 출간한 것이다. 박완서는 국민학교 5학년 때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경험을 여러 차례 회고한 바 있다.
『흙』(이광수, 1932~1933)은 이광수의 장편소설로, 1932년 4월 12일부터 1933년 7월 10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1933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박완서는 유년시절에 처음으로 들은 작가의 이름이 이광수였다고 말하면서, 삼촌과 삼촌의 친구들이 이광수의 『무정』이나 『흙』을 보물처럼 아끼며 돌려보던 일을 회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