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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호영진이 1988년 5월 암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8월, 아들 호원태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다. [B] 그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 역시 웃으면서 그 얘기를 아들에게 했다. 설마 비뚜루 걷는 병도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아들의 반응은 심각했고 당장 누나와 매형에게 전화해서 여러 말을 수군대더니 그 밤으로 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아버지한테 베란다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보라느니, 손가락으로 코끝을 가리키라느니, 두 팔로 앞으로 나란히를 해보라느니 꼭 세 살 먹은 어린애 재롱 보듯이 시험을 했다. 그러고 나서 내일 당장 뇌를 CT촬영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아직도 수련의 아니면 기초의학 전공인 그들의 진단의 한계였다. 그러나 나는 수도 없는 검사를 거친 노련한 주치의의 진단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몸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놈의 암이 뇌 속으로 옮아갔다는 걸 인정하는 건 너무도 무섭고 분노스러웠다. 견딜 수 없이 비참한 밤을 보내고 나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찾아간 병원에서 그러나 CT촬영은 불가능했다. 노사분규가 극도에 달했던 88년 초였다. 그가 그 동안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받아오던 종합병원도 막 그날 아침부터 간호사를 비롯한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가 병원 업무가 마비돼 있었다. 환자들은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면서도 한마디씩 한탄을 하거나 욕을 했다. 이층에선 일손을 놓고 권리를 부르짖는 근로자들의 노랫소리, 구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떠밀려 나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거기서 뭣들 하고 있어, 지금 내 남편이 죽어가는데, 제발 내 남편 좀 살려줘.” 이런 아우성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 [박완서]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문학동네, 2013) [C] 내가 창환일 잃고 나서 친척이고 친구고 멀쩡하게 아들 잘 기른 사람들이 나한테 괜히 미안해하는 거, 나 알아요. 아들 자랑 하다가도 내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장가보낼 때 나한테 청첩장을 보낼까 말까 망설이고, 내가 행여 즈이들이 부러워 마음 상할까봐 그런다는 거 알아요. 명애라고, 형님도 아시죠 우리가 성북동 살 때 아래윗집 살면서 부추전만 부쳐도 담 너머로 나눠먹던 제 여고동창 말예요. 걔 아들하고 창환이하고도 국민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동창이었다구요. 서로 사는 내막 속속들이 알고 마음이 통해 숨기는 거 없기는 형님보다 훨씬 가까웠더랬죠. 형님도 물론 그러시겠지만 시집 쪽 친척은 아무리 촌수가 가까워도 어느 정도 이상은 친해질 수 없는 껍질 같은 걸 가지고 대하게 되더라구요. 창환이가 그 지경 당하고 나서도 어느 친척도 명애만큼 놀라고 슬퍼하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통곡하면 같이 통곡하고, 펄쩍펄쩍 뛰면 같이 펄쩍펄쩍 뛰고, 내가 몸져누웠을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갖 죽을 다 쑤어서 날랐죠. 형님도 죽 쒀온 적 있으시다구요 꼭 안 듣는 척하시다가도 틀린 말은 한마디도 못 참으신다니까, 글쎄. 그런 명애도 즈이 아들 장가들일 때는 나한테 쉬쉬하더라니까요. 혼인날 딴 동창한테 듣고 알았어요. 식장이 찾기 어려운 변두리 동네 교회라 나한테 길을 물어온 동창도 내가 그때까지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처음에는 안 믿다가 나중에는 자기 생각이 명애에 못 미쳤노라고 사과를 하면서 제발 모르는 걸로 해달라나요. 형님 제가 뭘 잘못했다구 이렇게 손도를 맞습니까 제가 손도를 맞는다는 건 창환이의 죽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게 되거든요. 그럴 수는 없었어요. (중략) 형님,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어찌 그리 모진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형님,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 [박완서]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문학동네, 2013)
1991년 장편소설 『미망』으로 제3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한다. 『미망』은 1985년 『문학사상』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으나 아들의 죽음으로 한동안 연재를 중단했다가 1990년에 완성된 소설이다. 1990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수상소감 박완서, <액운과 싸우며 쓴 소설>(제3회 이산문학상, 1991) 저는 참 변변치 못한 작가입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도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수상식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치러내야 할 걱정부터 앞섰으니까요. 문학상이란 이름이 붙은 상을 받아보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상받는 데 이골이 나서 수상식에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닙니다. 실상 처음 상을 받을 때는 더했습니다.수상식의 주인공 노릇을 해야 할 일이 근심스러운 나머지 거의 상 받는 기쁨을 실감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번에도 이런 변변치 못한 수상식 공포증은 여전했습니다만 수상작이 「미망』이기에 감회는 각별했습니다. 「미망』은 너무도 힘들게 쓴 작품입니다. 그 경황중에 어떻게 그 긴 소설을 썼을까,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다 저려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조금이나마 대견스럽다거나 작품이 만족스럽다는 얘기하곤 다릅니다. 오히려 그 와중에도 집필을 계속한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그 작품엔 처음부터 제 힘에 부치는 고난이 엎친 데 덮쳐왔습니다. 『문학사상』에 연재 예고가 나가고 첫회분을 쓰는데 막내딸이 교통 사고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첫회부터 구멍을 낼 수 없다는 어줍잖은 사명감 때문에 병실에서 밤을 새우며 원고지 칸을 메꿨습니다. 거듭되는 입·퇴원과 재수술로 딸의 투병 생활은 일년이 넘어 계속되었고 병실에서 원고지 칸을 메꿔야 할 때마다 연재를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며, 그런 상황에서도 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지겨워했는지 모릅니다. 딸이 다시 건강과 행복을 되찾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다시 암 병동에서 원고를 쓰면서 혹시 이 소설에 액운이 따르는 게 아닐까 하는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문득문득 전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까짓 글쓰기가 뭐관데 하는 쓸쓸한 허망감밖에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암과 싸우는 남편 곁에서 나 역시 액운과 싸우듯이 죽자구나 글쓰기에 매달렸드랬었습니다. 그가 암에 지고 나자 저도 더 이상 액운과 싸울 기력도 없어졌거니와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액운도 그 정도로 끝을 보았으니 떨어져나갔겠거니 싶은 참담한 안도감 때문에 더욱 허탈했습니다. 그러나 액운은 액운답게 잔혹할 뿐 아니라 비열하기도 해서 제가 참담을 지나 거의 평화로운 패배감과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다시 한번 저를 강타했습니다. 반려를 잃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자식을 앞세우는 참척까지 겪고 나자 비로소 액운이 조금도 무섭지 않아졌습니다. 그 동안 소설 쓰기를 중단하지 않으려고 악전고투한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기조차 싫었고 다시는 글을 쓰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후의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순전히 살아내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내나 하는 게 매일매일의 벅찬 과제였습니다. 태어난 이상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피할 길 없는 가혹한 명제에 어느 틈엔가 슬며시 내가 만들어낸 작중인물들의 운명 또한 비롯됨이 있었으니 마무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이랄까 작가 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가중돼왔습니다. 붓을 꺾은 지 채 일년도 안 돼서입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고 여겼건만 막상작품을 완결지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나니 액운에 대한 미신적인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천 장 가량은 마치 뒤쫓는 악마에게 덜미를 잡힐까봐 죽자구나 달리듯 미친 듯이 써갈겨 겨우 완결을 지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만들어낸 인간들의 운명으로부터 손을 떼기 위한 작업이었건만 그 결과는 완성을 위한 완성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금씩 글을 쓸 수가 있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제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이 없어진 이 세상이나마 다시 사랑하기 시작한 징후였습니다. 끔찍하고도 민망한 노릇이나 숨김없는 고백입니다. 상을 받는 마당에 액운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했습니다. 애물단지가 효도하는 걸 보는 것 같은 서글픈 감회 때문에 그만 그렇게되고 말았습니다. 일껏 주시는 상, 영광스러운 짐으로 여기지는 않으렵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이나마 문득 문득 살맛나게 해주는 선후배의 따뜻한 미소, 안타까워서 쳐주는 박수 정도로 알고 즐겁게 받겠습니다. —『문학과사회』 1991년 가을호
1990년 장편소설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한다. 대한민국문학상은 1976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관하여 매년 문화의 달인 10월에 시상했던 문학상으로 한국의 문학상 중 가장 다양하고 종합적인 상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미망』은 1985년 『문학사상』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으나 아들의 죽음으로 한동안 연재를 중단했다가 1990년에 완성된 소설이다.
1993년, 단편소설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시상식은 1993년 4월 2일 언론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대회의장에서 열렸다. ○ 수상소감 박완서, <반성의 기회>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감, 1993) 힘에 부치는 고달픈 여행에서 돌아와 혼곤한 잠에 빠졌다가 현대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금은 쓸쓸한 마음으로 이십여 년 전 처음 소설가가 됐을 때 생각을 했습니다. 문예지가 아닌 여성지를 통해 등단했기 때문인지 그때의 내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은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쯤 『현대문학』 같은 지면에서 원고청탁을 받을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현대문학』은 문학 지망생에게 거의 유일한 꿈의 지면이었습니다. 왜 그때 생각을 했을까요. 그 『현대문학』에서 너에게 상을 준대, 하고 기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무지 기쁨이 우러나지 않는 스스로를 부추겨 억지로라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억지로라는 말 이상을 함부로 여기는 투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새는 무엇 하나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수상작도 실은 억지로 쓴 작품입니다. 정말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현실 읽기에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앞이 캄캄할 적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소설의 이야기성과 그 이야기 속에 삶을 반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기를 꿈꾸는 지극히 보수적인 이야기꾼입니다. 그런 저의 설 자리가 자꾸 좁아져 겨우 억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 구닥다리 방법으로는 한치 앞을 못 내다보게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버겁다는 엄살을 떨래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진실을 만들어내려는 고통보다는 손끝에 익힌 재주에 의지하고 있다는 자격지심 때문입니다. 남들이 저를 잘 팔리는 작가로 알아준다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스스로 느끼는 비소(卑小)함, 정열없음에 대한 부끄러움에 무슨 위안이 되겠습니까. 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록 위안이나 기쁨이 되진 않았다고 해도, 과연 이 상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하는 망설임을 통해 저의 마음의 태만을 반성할 수 있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1993.
1999년,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제14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11월 19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진행됐다. ○ 수상소감 박완서, <이 상이 내 상복의 유종의 미가 되었으면>(제14회 만해문학상 수상 소감, 1999) 아차산 기슭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산 지 일년이 좀 넘는다. 높이가 삼백미터도 안되어서 산이라기보다는 뒷동산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게 들린다. 그러나 자주 오르내리는 사이에 그렇게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능선이 길고 골이 깊어 길을 잃고 헤맨 적도 있다. 백제의 유적인 아차산성이 남아 있는가 하면, 남하한 고구려가 최후의 혈전을 벌인 보루성 터가 곳곳에 남아 있어, 발굴이 끝난 데도 있고 아직도 진행중인 데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뒷동산에서 예사롭지 않은 정기를 느끼는 건 그런 유적지보다는 예사롭지 않게 살다 간 어른들의 묘소 때문이다. 뒷동산에 올라 서울 쪽과 반대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서 소파 방정환, 문일평, 지석영, 박인환, 조봉암 등의 묘소가 멀지 않은 거리에 흩어져 있다. 나름대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분들이지만, 한용운의 묘소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그 어른을 우러르고 기리는 마음의 간절하고 거짓없음 때문이다. 상복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주요한 문학상을 거의 다 타게 되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했을 리는 없고, 그것도 복인가보다 하고 느슨하게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상을 휩쓸었다는 소리까지 심심찮게 들으면서도 그 울림이 너무 듣기 싫어서 아무리 상이라 해도 주는 대로 받아서는 안되겠다 곰곰이 반성을 하고 있던 차에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 상을 탄다는 건 곤혹스럽지만 내가 감히 어떻게 '만해' 자가 붙은 상을 거부할 수가 있겠는가. 겸손되이 떨리는 마음으로 받되 이 상으로 내 상복의 유종의 미를 삼을 수만 있다면 내 문학에도 그지없는 영광이 될 테지만 내가 닮고 싶은 만해의 결곡한 정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방법도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해주신 분들에게도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창작과비평』 106호, 1999년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99.
2001년, 단편소설 「그리움을 위하여」로 제1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사가 살아있다는 점이 미덕으로 뽑히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시상식은 2001년 10월 12일 호암아트홀에서 진행됐다.
1993년,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로 제19회 중앙문화대상 예술 분야 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1993년 10월 8일 중앙일보사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