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33건
개성시 만월동에 있던 여성 교육기관이다. 1899년 12월 미국 남감리회의 캐롤(Carroll)이 개성에 부임하여 '쌍소나무집'이라는 초가를 사들인 후 신식교육 수업을 시작했다. 1904년 12월 정식 기숙 여학교인 '개성여학당'이 탄생했다. 1906년 개성여학당은 배목골(현 만월동)의 넓은 집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후원자의 이름을 따 탈루야(두을라) 학당으로 불렸다. 1908년 교사를 신축했고, 1909년 개성을 방문한 스탤리 박사가 신관 건축 비용을 기부한 것을 기념하여 그가 원조를 받은 '홀스톤(Holston)' 지방의 이름을 따 '호수돈'이라는 교명을 사용하게 됐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며 개성에 있던 학교가 대전에서 재건되었다. 1954년 호수돈여자중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개성시 만월동에 있었던 호수돈여숙의 정확한 주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호수돈여숙이 만월대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1957년까지도 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남아 있다. 해당 사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인천난정평화교육원에서 열리는 특별전시 「개성 만월대 열두 해의 발굴전」(2024.6.3.~2025.1.31.)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장편소설 『미망』 — 진동열 선생의 딸 진달래가 다니는 학교로, 진달래에게 반한 손태남이 달래를 만나기 위해 찾는 곳이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2학년으로 진학할 무렵에 '나'는 호수돈고녀로 전학을 신청한다.
한국전쟁 당시 판자촌이 들어섰던 낙산 꼭대기 동네. 『도시의 흉년』에서 북한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때 수연 가족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1.4후퇴 당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재산들을 훔쳐 수연 모친이 최초의 부를 축적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894년 효창공원 일대에 일본군이 주둔해 용산 지역이 일본인 정착지가 되었다. 지금의 원효로 1~4가, 한강로 1~3가, 문배동, 신계동 등에 특히 일본인이 많이 거주해 1925년 일본인 거주 비율이 90% 이상에 달했다. 현재도 용산 곳곳에 적산가옥이 남아 있다. 『도시의 흉년』에서는 수연의 이모가 금호동으로 이사하기 전 거주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일대에 달러가 풍부하고 젊은 여자들과 미군들이 많이 오다녀,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수연의 모친 김복실이 이곳에서 양색시 장사를 벌인다.
1895년 9월 26일 '관립장동소학교'로 개교했다가 11월 15일 '관립매동소학교'로 개칭하고 서울 종로구 통의동으로 이전한다. 1933년 현재의 위치(서울 종로구 사직로9길 19 ; 구 종로구 필운동 32)에 자리를 잡았다. 1938년 4월부터 제3차 조선교육령(칙령 제103호, 1938.03.03)에 따라 명칭이 '경성매동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었다가 1941년 4월에는 국민학교령(칙령 제148호, 1941.02.28)에 따라 다시 '경성매동공립국민학교'로 바뀌었다. 박완서가 입학할 당시의 학교 이름은 '경성매동공립심상소학교'이다. ○ 1938년 3월 무렵, 초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다. — 당시에는 거주지에 따라 지원 학교가 정해져 있었지만, 어머니는 서대문 밖에 살면서도 친척에게 부탁하여 기류계를 옮겨 문안에 자리한 매동초등학교에 지원했다. 이때문에 박완서는 서류상의 주소(사직동 혹은 누상동)와 실제로 거주하는 주소(현저동)를 모두 외우느라 고역을 겪었다. ○ 1938년 4월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 3월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루다 선생님과 대면으로 치루어진 입학시험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은 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1938년 4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다. — 사대문 안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인왕산을 넘어 다녔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현저동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혼자서 등학교를 하다 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배신으로 현저동에 산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더욱 외로운 학교 생활을 보내야 했다. 대신 방학이 되면 개성 박적골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다. ○ 1939년 2학년() 때 초등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조선어를 배우다. — 1938년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는 ‘황국신민화’를 보다 철저하게 추진하려는 의도에서 제3차 「조선교육령」(1938. 2. 23, 개정 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어·일본사·수신·체육 등의 교과가 강화되면서 조선어 교육도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어가 필수과목에서 해제됨으로써 기존의 교과서였던 『보통학교조선어독본』(전6권) 역시 『초등조선어독본(初等朝鮮語讀本)』 (전2권, 1939년 발행)으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8차 조선교육령(1940.03.25) 공포되면서 전시교육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 1940년 3학년 때 예배당을 다니던 친구를 알게 되다. ○ 1941년 4학년 때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다. ○ 1942년 5학년 때부터 친구 J와 깊은 우정을 쌓다. — 초등학교에 전학 온 친구 J(=복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만나 도서관(경성부립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으면서 책 읽는 재미를 만끽하였다. J가 경기고녀()에 진학하고 박완서가 숙명고녀에 진학하면서 잠시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수원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 1943년 6학년 때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하다. — 5학년 때부터 사귄 친구 J와 함께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 틈날 때마다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할머니를 만났다. 이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1906년 5월 22일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라는 명칭으로 개교하였다. 박완서는 1944년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는데 당시 학교 이름은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女)’였다. 당시 학교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에 위치하였으며, 1981년 3월에 현재 위치인 서울 강남구 도곡동 91로 이전하였다. 소설가 김명순·박화성·최정희·한말숙 등이 동문이다. ○ 1944년, 14살에 입학하다. — 일제 말기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어 운모(雲母) 작업, 방공 연습 등을 하다. —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고녀로 전학을 가지만 열흘쯤 다닌 후 폐침윤에 걸려 박적골로 요양을 가다. ○ 1945년 2학년, 10월 1일 해방을 맞아 개교하다. — 여름 방학 동안 해방이 되어 숙명고녀에 복학하다. — (신문로 시절) 일본 신조사(新潮社)에서 나온 38권의 《세계 문학 전집》을 독파하다. — 미국식 교육과 함께 도입된 자치회 활동을 하다. ○ 1946년 3학년, — 민청(民靑) 조직인 독서회에 속하며 남산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하다. — 6월에 학제가 4년에서 6년으로 바뀌며 광복 후 처음이자 4년제의 마지막 학생들이 졸업하다. ○ 1948년 5학년, — 문과, 이과, 가사과 중 문과를 택하다. 소설가 박노갑을 담임으로 만나고, 소설가 한말숙·김종숙, 시인 박명성·김양식, 성악가 이경숙 등과 같은 반이 되다. — 김종숙과 화신백화점의 영화관에 가서 몰래 영화를 보다. 수업을 빼먹은 것을 들키자 박노갑 선생님을 찾아가는데, 그의 자택이 현저동인 것을 알고 동질감을 느끼다. — 6월에 첫 번째의 6년제 졸업생(38회) 58명이 졸업하다. ○ 1950년 6학년, 학교를 졸업하다. — 동창 김종숙네가 종로서관을 개점하여 《문예》와 신간 등을 빌려보다. — 4월 경, 김종숙에게 예상 문제집을 빌려 수험 공부를 한 후, 서울대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하다. — 5월, 학제가 바뀌어 “9개월밖에” 다니지 않고 졸업하다. 두 번째의 6년제 졸업(39회)으로, 졸업생은 146명이었다. . ○ 졸업 이후에도 여러 학교 행사에 참석하다. — 1978년 4월, 1996년 10월, 2000년 11월 ‘박완서 초청 문학 강연회’를 하다. — 1996년 5월 숙명 90주년 행사에서 숙녀회 주관의 ‘자랑스러운 숙명인상’을, 2001년 5월 학교 주관의 ‘대숙명인상’을 표창받다. — 2005년 11월 동문의 친목 도모와 문학 활동을 위해 창립된 ‘숙란문인회(淑蘭文A會)’의 1기 부회장을 맡다. 동창인 한말숙이 회장으로 김양식이 감사로, 박명성이 회원으로 있다. ○ 장편소설 『미망』 — 『미망』에서 이여란은 동갑 친구이자 의사가 꿈인 동기 기선이를 기숙사에서 만난다. 기선이는 고보에서 상급 학교로 진학하려면 보아야 하는 수험 준비서 안에 조선 사람의 자존심을 밟는 내용이 가득하다는 점에 울분을 토한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목마른 계절』에서 '하진'과 '박향아'가 다닌 'B고녀'를 숙명여자고등학교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박완서의 고등학생 시절과 마찬가지로 두 인물은 해방과 더불어 학제가 변경됨에 따라 학교를 6년 간 다녀야 했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숙명고녀에 복학한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석조문으로,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유적이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학생심사에서 떨어진 '하진'과 '김순덕'은 학교에서 나와 독립문 쪽을 향해 걷는다. 이때 재판을 받고 형무소로 돌아가는 부역자들의 행렬을 본다. ○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북조선 가무단 방소(訪蘇) 예술단의 위안 공연을 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으며 홍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화현이라고 불렀는데, 『목마른 계절』에 '홍제원고개'라고 언급된 곳이 모화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현저(峴底)라는 동명은 모화현 일대 마을을 '모화현 아랫동네'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돈암동 집을 떠난 '하진'과 '혜순'은 '찬'을 업고 전차를 타고 영천까지 간 뒤, 걸어서 홍제원고개를 넘어 구파발로 향한다.
1948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한 극장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3가 63의 위치에 있었다. 개봉관에서의 상영이 끝난 영화를 틀어주는 재개봉관이었다. 영화표 가격이 저렴하여 당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문화시설이었다. 1981년 폐관한 후에는 가구점의 창고로 쓰이다가 1985년 상가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은행 동소문로지점 건물이 있는 자리이다([참조] 성북마을아카이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나'가 지내던 숙부네 가게가 동도극장 건너편에 있어 '나'가 이곳에 자주 방문한다.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었던 법정동으로, 2007년 8월 법정동인 진관내동, 진관외동과 통합되어 진관동이 되었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하열'이 구파발동에 위치한 작은 병원인 '십자의원'에 입원해 있다. 이곳에서 '하진'과 '혜순'은 '하열'과 재회한다. '하열'의 다리 부상은 걷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 점차 N농업학교의 동료 교사들의 문병이 줄어들고 십자의원의 의사마저 피난길에 오른다. '서 여사'도 이곳 병원으로 와 합류해 있다. ○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나' 일행이 '신씨'의 마차를 타고 구파발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신씨'는 떠나고, '나' 일행은 개성이 있는 북쪽으로 가는데, 이때 국도를 따라 걷다가 국도를 벗어나 파주 방향으로 걷는다.
1899년 5월 개통하여 1968년 11월까지 서울전차가 다니던 길을 가리킨다. 서울전차는 서울 시내에서 운영하였던 노면전차를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전차라고 불렀으며 광복 이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면서 경전전차(京電電車) 또는 경전(京電)이라고 불렀다.서울전차의 첫 노선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지나는 5km의 단일 노선이었는데, 점차 서울 시내 곳곳으로 확장되었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하진'과 '혜순'이 서울 소식을 듣고 교하면을 떠나 현저동 집으로 향한다. 교하면에 오기 전에 지냈던 산골짜기 빈집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를 지나, 철길을 따라 걸어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쪽으로 들어선다. 이때 철길은 서울전차가 다니던 길을 뜻한다. ○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 1」 — '나'는 낭떠러지 밑에 있는 집에 사는 땜장이 딸을 따라 조금씩 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전찻길까지 구경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