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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졸업반 때는 제일 친한 친구네가 종로서관을 개점했다. 지금의 종로서점과 같은 자리였고, 당시의 서울서는 제일 큰 규모의 서점이었다. 나는 공연히 신바람이 났고, 가장 친하던 친구가 가장 부러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간을 빌려다 볼 수는 없었고, 하굣길에 들러서 마냥 서서 읽곤 했다. 창간된 지 얼마 안 되는 ‘문예’지를 서서 읽는 재미도 꿀맛이었다. 신간 서적을 이것저것 뒤적이며 속으로 그중의 한 권을 감쪽같이 훔칠 수 있는 계략에 탐닉하다보면 손끝이 떨리기도 했다. 종로서관엔 내 친구네 가족이 총동원돼서 점원 일을 보고 있었는데, 친구의 할아버지는 나처럼 속이 검은 사람들을 망보는 일을 하고 계셨다. 내 속셈에 내가 놀라서 힐끗 할아버지 쪽을 보면 할아버지도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그러면 훔치다 들킨 것처럼 공연히 어쩔 줄을 모르곤 했다. — [박완서]책 가난 고금古今 [A] 종로서적이 처음 개점할 때 이름은 종로서관이었다. 아마 숙명여고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문학의 세례를 받은 문학소녀들에게 그곳은 꿈의 궁전이었다. 처음 보는 대형서점이었다.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마어마하게 큰 매장이 우리 말로 된 책으로 꽉차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 [박완서]두 친구, 호미(열림원, 2014) [B] 김종숙이는 그때 자기 집이 종로서관을 했다. 지금의 종로서적의 전신이 바로 그 애네 집 거였다. 걔한테서 그 무렵의 순수 문예지인 《문예》도 빌려 보고 신간 서적도 빌려 보았다. 지금처럼 신간이 많이 나올 때도 아니었건만 종로서관에 들를 때마다 그 많은 책이 다 그 애 거만 같아서 여간 부럽지가 않았다. 또 그때마다 그 애 할아버지가 매장 한가운데서 감시꾼 노릇을 하고 서 계신 게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지금 돌이켜 보니 훔칠 기회를 엿봤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때도 종로서관 하면 서울에서 제일 큰 책방이었는데도 온 집안이 총동원이 돼서 팔기도 하고 경리도 보고 감시도 하는 가족 경영 체제였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B] 육학년이 되자 상급 학교 입시 준비가 요새 같지는 않았어도 담임도 무서운 선생님이 맡게 되었고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남아서 늦게까지 공부도 하고 시험도 쳤다. 그러나 복순이하고 나는 여전히 일요일이면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숙제도 많이 내주었지만 토요일 날 둘이서 같이 후딱후딱 해치웠다. 복순이와 나는 늘 붙어 다녀 선생님이나 반 애들이 다 알아주는 단짝이 되었다. 복순이는 공부도 아주 잘했다. 나도 복순이와 단짝이 된 후 성적이 좀 올랐다. 단짝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되레 단짝과의 경쟁의식이 되지 않았나 싶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B] 이학기부터는 아무래도 입시 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다리를 몹시 삐어 집에서 쉬는 동안도 반장과 긴밀히 연락하여 시험문제를 내주고 채점을 해서 보내고 체벌까지도 하달을 했다. 조선 선생님이었고 아기가 하나 딸린 부인이어서 엄마는 여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조선인 선생까지도 일본말을 모르는 학부형하고 상담할 때는 통역을 내세우는 짓을 더러 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 상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호감을 살 만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하는 체벌은 매우 독특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육학년 다섯 반 중 두 반이 여자 반이었는데, 우리의 성적을 올릴 의도였겠지만 선생님은 끊임없이 다른 반과의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일제 고사 성적이 그 반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자기 점수에 상관없이 전체가 벌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우리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상대방의 뺨을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끼리 때리면 살살 때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살살 때리는 기미가 보이면 선생님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너희들이 그런 잔꾀를 부리면 마냥 때리게 할 거라고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때리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생각해 보라. 열서너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이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증오심을 무진장 상승시켜 가며 꽃 같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도록 사매질을 하는 광경을. 그거야말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도였다. 복순이와 나는 성적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성적순으로 앉을 때나 키순으로 앉을 때나 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별수 없이 이 야만적인 증오심에 씌어 점점 강도가 높게 서로의 뺨을 때렸다. 어느 고비를 지나면 누가 더 아프게 때리나는 별로 문제 되지 않고 우리의 그 짓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채찍을 우리의 배후에 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의 그만 소리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증오심은 곧 수치심으로 변해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생각하 ㄹ기도 싫은 끔찍한 체벌이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여태껏 만나 본 어떤 선생님보다도 수더분하여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그런 분이 왜 우리로 하여금 그 나이에 그런 짐승의 시간을 갖게 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A] 국민학교 때,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개성에서 20리 밖 촌에 사시는 우리 할머니는 손녀를 보러 개성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나는 우리 반이 역 앞 광장에 정렬하기 전서부터 할머니를 보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뻣뻣하게 풀을 먹인 당목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머리엔 베 보자기에 싼 보따리까지 이고 계신 할머니가 창피해서 나는 끝내 모르는 척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단념하지 않으시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이름을 일본말로 바꿔 부르던 일제시대라 “완서야, 완서야” 하는 할머니의 외침을 내 이름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와서 허탕을 칠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서투른 발음으로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의 혀 짧은 발음이 어찌나 우습고도 슬프던지 나는 “할머니” 하면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박완서]할머니 [A] 우리는 개성역 광장에 네 줄로 정렬했다. 그때도 나는 앞에 선 아이의 뒤통수만 보고 한눈 한번 안 팔았다. 이때였다. 어디서 “완서야, 완서야” 하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러나 마음 모질게 먹고 나서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곧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 부를 때라 ‘완서’가 내 이름이라고 선뜻 알 만한 아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다. 나는 어서어서 선생님이 우리들을 이끌고 어디론지 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할머니는 마침내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보꾸엔쇼야, 보꾸엔쇼야.”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입에 담으신 최초의 일본말이자 마지막 일본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 발음이 오죽했겠는가.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는 목놓아 울고 싶도록 슬프게 들렸다. 아무도 할머니의 그 괴상한 발음이 내 이름이란 걸 알아듣기 전에 나는 슬픔과 미움과 사랑이 뒤죽박죽된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로 뛰어갔다. [박완서]할머니와 베보자기 [B]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 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 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나올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 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을 점검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할머니는 풀을 세게 먹여 다듬은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뻗쳐 입고 머리에는 베 보자기에 싼 커다란 임을 이고 있었다. 수치감과 분노로 화끈해진 얼굴을 깊이 숙이고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복순이의 손을 꼭 붙들었다. 내 조선말 이름은 복순이밖에 누가 알랴 싶었다. 할머니한텐 좀 안됐지만 눈 딱 감고, 귀먹은 셈 치고 이 고비를 넘기자, 그런 속셈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이 애 저 애 붙들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자 할머니는 어디서 배워 왔는지 이번엔 일본말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아무도 못 알아들을 혀 꼬부라진 어눌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나는 더는 참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그 어려운 발음을 시킨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그럴 땐 우는 게 유일한 내 재주였다. 나는 “할머니!” 하면서 그 뻣뻣한 치마폭으로 달려들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하면서 연방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몇천 리 밖에 떨어져 지낸 손녀와 할머니처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엔 다시 작은 보따리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송편이었다. 필경 며느리를 닦달질해 밤새 빚어 새벽에 쪄 가지고 달려오신 듯 말랑한 송편에선 솔 내와 참기름 내가 물씬 났다. 그러나 나는 오직 아이들 보기에 창피하단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그 고역스러운 시간을 면하고 싶었다. 흐트러진 열을 바로 세우려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할머니는 한 보따리는 선생님 드리고, 한 보따리는 서울로 가지고 가서 작은집과 나누어 먹고, 또 한 보따리는 아이들하고 나누어 먹으라고 송편이 세 보따리인 까닭을 설명해 주고 비로소 작별을 아쉬워했다. 다행히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리를 삐어서 여행에 따라오지 못하고 딴 반 선생님이 우리를 인솔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혹시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싶어 할까 봐 그 얘기를 재빨리 할머니 귀에 속삭이고는 어서 가시라고 밀어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저만치 떨어져서 우리가 정렬하여 차례로 역 광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걸 의식하며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행히 복순이가 말없이 나에게 덧붙여진 짐을 같이 들어 주었다. 만월대, 선죽교 등 정해진 코스를 도는 동안 내내 우울했다. 점심을 먹을 때 나는 그 송편을 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한테 드리지도 않았다. 다 큰 나이라 내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긴 데 대해 반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기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우울하다는 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반성과 우리 집안은 왜 이럴까 반발하는 마음이 반반씩이었다. 친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과 과보호가 점차 나를 옥죄는 것 같아 그게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밤에 도착한 경성역엔 또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에게 송편 보따리를 인계할 때까지 꾸준하게 그걸 들어 주고 내 배배 꼬인 심보를 이해해 준 복순이에게도 단 한 개의 송편도 맛뵈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먼저 남대문통 작은숙부네에 들러서 송편 보따리를 끌러 두 집이 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하면서, 작은숙부 내외가 큰숙모의 노고와 솜씨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민학교 마지막 수학여행은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A] 일제 말기에 우리집은 총독부의 소개령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식량난이 극심할 때였다. 소개령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도 고향에 조부모님이 남아 계시고 토지도 좀 있는 우리 같은 집에서는 식량난이라도 해결해보려고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숙명여고에 다니고 있던 나는 호수돈여고로 전학을 했다. 이십 리 밖에서 통학할 수는 없으므로 개성 시내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며칠 안 있다 여름방학이 되고, 그 여름방학중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는 고향 마을에서 빈둥대다 일가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개성으로 나갔다. 그때 개성에는 소련군이 주둔해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어떻게 된 게 그 삼팔선이라는 게 왔다갔다해서, 개성이 삼팔 이남이었다가 며칠 만에 이북이 됐다가, 다시 삼팔 이남이 되어, 지금처럼 휴전선 이북땅이 될 때까지 쭉 이남 땅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하필 이북땅이었을 적에 기차를 타려고 개성에 갔더니, 서울 가려면 삼팔 이남 땅인 봉동역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삼팔선이라는 게 얼마나 지엄한 선이 되리라는 걸 전혀 짐작도 못했으므로 현실적으로 있지도 않은 선 때문에 기차가 못 다닌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개성에서 봉동역까지는 다시 이십 리는 걸어야 했다. 당일로 사십 리를 걷는다는 게 무리였고, 또 곧 기차가 다니게 될 거라는 소문도 있고 해서 시내에 며칠 머무르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군에 대한 소문이 하도 흉흉해서, 겁에 질린 엄마가 서둘러 다음 날로 봉동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야다리는 개성에서 서울로 난 국도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었다. 처음으로 건너본 야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야다리 이쪽에는 소련군이 보초를 서 있고 건너편 남쪽에는 미군이 보초를 서 있었다. 기차가 안 통하니까 많은 사람이 야다리를 건너 봉동까지 가고 있었지만 양쪽 군인 다 보초를 서고 있을 뿐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 다리가 어떻게 생긴 다리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처음 보는 외국 군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 평범한 다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팔선이 지나가는 다리일 터인데 금 같은 것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그 후 야다리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1985년, 딱 한 번 성사된 남북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분의 글을 통해서였다. 판문점에서 버스로 십오 분 만에 야다리를 건너 개성에 이르렀는데 야다리 모습은 그대론데 이름은 통일다리로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 [박완서]야다리와 구름다리 [B] 나는 다니던 학교에 인사를 갈 경황도 없이 개성으로 이사를 했고, 며칠 만에 학무국으로부터 호수돈으로 등교하라는 통지가 나와 저절로 전학이 되었다. 오빠는 서울에 처졌고 그 여자는 완쾌해서 퇴원을 해 고향으로 내려가 몸보신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개성에 새로 장만한 집은 농바위고개 밑 남산동에 있었다. 박적골을 자주 드나들 것을 고려해 거기다 산 것 같았다. 호수돈고녀하고도 별로 멀지 않았다. 엄마하고 처음 등교한 호수돈고녀는 지대가 높고 화강암의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교사에다가 마당이 넓고 녹지대가 많았다. 마침 벚꽃이 만발해 별천지 같았다. 그러나 왠지 내가 장차 다닐 학교라는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붙임성도 없는 데다가 우리 학교라는 생각까지 없으니까 꽁하니 입 다물고 옆에 앉은 짝의 얼굴도 변변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나에게 불어 닥친 환경의 변화가 분하고 억울해서 툭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열흘쯤 다니고 나서 감기를 핑계로 며칠 결석을 했다. 분명히 꾀병을 앓을 작정이었는데 계속해서 미열이 있었다.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 도립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라고 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지나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도립병원에서 찍어 본 엑스레이 결과는 폐침윤이라고 했다. 폐 소리만 듣고도 질겁을 한 엄마는 혹시 폐병이 되는 병은 아니냐고 했고 요양을 잘 못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사의 대답을 얻어 냈다. 나는 한약 보따리를 싸 들고 박적골로 보내졌다. 엄마는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혹시 폐병이 되면 어쩌나 하는 숨은 걱정을 엉뚱하게 나에게다 발산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감기 한 번 안 앓아 봤을 리도 없거니와 배탈, 학질, 횟배 등 더 나쁜 병을 앓을 때도 결석 한 번을 제대로 못 해 봤기 때문이다. 죽을병이 들지 않은 바에야 학교를 결석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세상에 나서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튼 옳다꾸나 하고 박적골로 갔다. 박적골의 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다. 서울로 간 후 그 계절에 내려와 보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천방지축 어린 나이였고 이제는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 소녀였다. 나는 동무 없이 혼자서 몽유병자처럼 산과 들을 누볐다. 올망졸망 어린 사촌 동생들을 거느리고 산나물을 억수로 많이 해 온 적도 있었다. 박적골 여자들처럼 종댕이(종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게 책가방보다 훨씬 나에게 어울렸다. 엄마가 아무리 애써도 나는 공부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에게 쏟은 엄마의 정성과 소망을 헛되게 하는 건 참 안되었지만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A]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숙명여고에 복교하고 보니 친구들은 대개 그대로였지만 학교 사정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제시대에 일어 선생님이 해방 후에도 국어 과목을 맡고 계신 건 어린 마음에도 저항이 갔다. 명색이 중학생이 허구한 날 ‘가갸거겨’를 익히느라 진땀을 뺐다.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낱말들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런 낱말들은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어린 우리들의 피를 끓게 했지만, 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식민지 교육을 받은 체질이 잘 소화를 시키지 못해 적지 아니 혼란을 겪었다. 미국식 교육이 급히 도입돼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장려하고 학생회가 조직되고 자치회가 열렸다. 우린 툭하면 수업을 보이콧하고 강당에 모여 자치회를 열었다. 우린 자치회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자치회에서 우리가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따위는 시시해서 아예 토의하지도 않고 신임 교장을 배척한다거나, ××선생을 교장으로 지지한다거나, ○○선생은 신임 교장파니 수업을 받지 말자거나―주로 이런 걸 결의하고 토의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다. 이런 현상은 해방 후 혼란기의 특색으로 학교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이런 병폐를 앓았더랬다. 별안간 눈부시게 쏟아진 자유를 미처 제대로 감당을 못했던 것이다. 우린 우리가 교장을 임명할 자유도, 싫은 선생한텐 수업을 안 받을 자유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학교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국민대회니 궐기대회니 하는 게 거의 날마다 열리고, 시위군중이 길을 누볐다. ‘국부 이승만 박사 절대 지지’니 ‘국부 김구 선생 절대 지지’니 하는 피켓을 든 군중이 지나가는가 하면 좌익 인사를 지지하는 데모대가 구호를 고래고래 외치며 지나가기도 했다. 또 ‘×× 절대 반대’ 데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신탁통치 절대 지지’ ‘신탁통치 절대 반대’ 데모만큼 극렬한 데모는 또 없었을 것이다. 온 장안이 술렁거렸고 거의 매일 연이어 데모가 계속됐다. 그때 비로소 좌익은 스스로의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하다가 별안간 지지로 바꿔 국민의 분노를 사고도 뻔뻔스럽게 극렬한 지지 데모를 전개했다. 정치적인 테러행위가 성행하고 ‘어깨’라는 폭력배의 새로운 명칭도 생겨났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절도 강도가 날뛰어 문단속을 심하게 하게 되고, 담장 위에 철망이나 유리병을 깨뜨려 박는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박완서]아물지 않는 상흔 [B] 나는 숙명고녀에 복학을 했다. 그냥 결석했다 출석한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여졌고 출석부에도 내 이름이 그냥 남아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에 해방이 됐기 때문에 고향이 이북인 아이들 중엔 아직 안 돌아온 아이들이 많았고 그런 아이들의 자리는 계속 비워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동안에 나에게 일어난 일의 부피와 세월의 부피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겨우 한 학기 동안 결석하고 돌아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우리가 입학할 때 학제로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기간을 고등학교라고 불렀는데 고등학교 이학년짜리가 가갸거겨부터 배우느라 법석이었다. 선생님들한테 야단을 맞아 가면서도 어려운 의사소통은 으레 일본말이 튀어나왔고 교과서 외의 읽을거리는 거의 일본의 소설류 아니면 일본말로 된 번역물이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우리 학교에도 민청民靑 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삼학년 때였다. 내가 어떻게 돼서 그 조직의 눈에 들고 포섭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별로 친하지 않은 아이로부터 독서회에 나와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나는 즉각 그 뜻을 알아차렸고 약간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응낙했다. 모임이 있는 아지트를 찾아가는 방법 등이 뭔가 비밀을 갖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거기서 돌아가며 읽는 책이나 토론하는 주제는 나를 최초로 사로잡은 팜플렛 지식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실망이 컸지만 나도 드디어 오빠의 동지가 됐다는 만족감은 뿌듯했다. 메이데이가 돌아왔다. 메이데이 행사를 좌익에선 남산에서, 우익에선 서울운동장에서 따로따로 편 갈라 하는데, 우리는 학교를 결석하고 남산에서 하는 메이데이 행사에 꼭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학교를 결석하고까지 남산에 갈 것인가는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도 그랬지만 나는 좌익이고 우익이고를 막론하고 집회나 시위, 구호 외치는 것 따위가 싫었다. 그러나 독서회가 있을 때마다 가장 가혹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게 이런 개인주의적 경향에 대해서였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학교를 빼먹고 남산으로 갔다. 노동자와 학생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한 굉장한 집회였다. 온종일 선창자를 따라 격렬한 구호를 외쳤고 인민가요를 한도 없이 따라 불렀다. 저녁에 파김치가 돼서 귀가한 나는 엄마의 추궁을 당해 낼 수가 없어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유치장 들어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기나 하느냐고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인지 온갖 끔찍한 소리를 다 해서 나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학교 가는 걸 한사코 말렸다.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 줄 테니 어제부터 아팠던 걸로 하고 며칠 결석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엄마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석을 하고 뒤로 알아본 결과 메이데이 날 결석을 한 아이는 일제히 교무실로 불려 가 남산에 갔나 안 갔나 조사를 받고, 갔다 온 것이 알려지면 굉장한 꾸지람을 듣고 학부형까지 불려 가 용서를 빌어야 했던 모양이다. 딴 학교에서는 경찰에 넘기기도 했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학내 문제로 온건하게 처리한 것이 그 정도였다. 아무도 내가 간 것을 고해바치지 않아 사나흘 후에 학교에 가니 아무런 문책도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때 얼마나 비겁하게 보였을까, 생각만 해도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메이데이 건에 대해선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의심도 안 받았을 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내가 그런 데 갔으려니 여기는 애가 없었다. 그건 내가 평소 너무도 고지식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나의 철저한 이중성에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 후 민청 조직이 와해된 건지 나만 따돌렸는지 다시는 접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A] 중3 때던가. 반이 바뀌면서 새로 사귄 친구네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의 방에 유리문이 달린 책장이 있고 그 안에 일본 신조사新潮社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고스란히 꽂혀 있었다. 눈이 부시고 가슴이 두근댔었다. 그중의 몇 권을 빌려 보기 위해 그 친구에게 서투르게 알랑대던 생각도 난다. 전질을 한 권 한 권 다 빌려 볼 작정이었으나, 빌려줄 때마다 깨끗이 보라고 하도 당부를 하며 생색을 내는 바람에 치사한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 [박완서]책 가난 고금古今 [B] 나도 신문로 집에서 처음으로 문학 전집을 한 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신조사에서 나온 서른여덟 권짜리 《세계 문학 전집》은 내가 갖기를 꿈꾸던 책이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를 위해 그걸 들여놔 주었는데 물론 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헌책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헐값으로 팔거나 버리고 간 책들이 일용 잡화와 함께 길거리 노점에 범람할 때였다. 아무리 책이 흔해졌다고 해도 그 문학 전집이 내 것이 됐다는 것은 꿈만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불어넣어진 생각인지 그 전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독파를 해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쿠오바디스』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은 깨가 쏟아지게 재미가 있었지만 『신곡』이나 『파우스트』는 그런 맹목적 사명감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못 읽겠는, 난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읽은 걸 결코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 하고 하여튼 읽긴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는 안 읽었고, 누가 그런 걸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알고 그럴까 열등감 반 의심 반으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세계 문학 전집》을 갖게 되고 나서 뒤미처 《톨스토이전집》도 갖게 되었다. 역시 오빠가 헌책방에서 보고 사다 주었는데 갈색 표지의 장정이 하도 엄숙하여 도저히 읽어 낼 것 같지 않은 인상부터 받았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 톨스토이의 중요한 장편들은 그 후 오랫동안에 걸쳐서이긴 하지만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또 읽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학이 되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렇고,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도 그렇고 한 번 읽은 걸 또 읽는 성질이 아닌데 그것들만이 예외였던 것은, 처음엔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되면서도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아 또 읽다가 차츰 재미를 느끼게 되고 무엇보다도 성격 묘사의 묘미에 최초로 매료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금 우울해진 집안 분위기도 집중적으로 독서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되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B] 중학교 오학년이 되면서 반을 문과, 이과, 가사과로 나누었다. 입학할 때도 세 반을 뽑았기 때문에 각각 한 반씩이었다.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문과를 택했다. 습관적인 독서 버릇 때문에 문과를 가장 편하게 여겼을 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방면에 소질이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예전 학제 같으면 졸업하고 전문학교 갈 때였으니까 웬만큼은 싹수가 보일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되레 문학소녀적인 기질이 두드러지는 애를 보면 나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문과 담임은 새로 부임해 온 박노갑朴魯甲 선생님이 되었는데 소설가라고 했다.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소설가의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침 그때 우리 집에서 구독하고 있는 일간신문에 그분의 소설이 연재되고 있어서 정말 소설가는 소설가로구나 싶어 약간 흥분까지 되었다. 오빠의 서가를 뒤져 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에도 그분 단편이 실린 걸 보고 그분의 빛깔을 알아 버린 것 같은 친밀감과 연민까지 느낀 것도 유별난 오빠를 둔 덕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 입시를 위한 준비 교육은 전혀 없어서 문과에선 꽤 여러 시간을 문학이니 창작이니 하는 시간에 할애하고 있었다. 그분이 국어뿐 아니라 그런 시간까지 담당을 했다. 그 무렵에 그분의 『40년』이라는 장편도 출간이 되었다. 가능한 한 그런 것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지만, 그분의 작품으로부터 영향받은 바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읽은 데 불과했다. 그러나 창작 시간의 그분의 문장 지도는 매우 엄격했고 나도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그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아!’니 ‘오오!’니 하는 투의 감탄사가 많이 들어가는 감상 과잉의 문장이었다. 그걸 어찌나 싫어하는지 그분이 그런 글을 야단칠 때는 그분 살갗에 닭살이 돋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느낄 정도였다. 당연히 남의 느낌이나 표현을 빌려다 써먹은 미사여구도 질색을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센티한 미사여구를 적절하게 구사하면 다들 그걸 문학에 소질이 있다고 말했고, 그런 재간이 있는 애를 문학소녀라고 불러 왔기 때문에 선생의 그런 문장 지도법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소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가 있었고, 나도 소질이 있을 것 같은 자기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선생님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눈이 맑고 크고 엄격한 인상이었지만 웃으면 금방 그 엄격함이 허물어지면서 어린애 같은 표정이 되었다. 겨울엔 주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좋은 감이 아니라 옥양목에 검정 물감을 들인 검소한 것이었다. 한문도 가르쳤는데 흥에 겨워 한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읊을 적에는 그 검정 두루마기가 참 잘 어울렸다. (중략)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노갑 선생님이 현저동에 산다는 걸 알았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말할 수 없는 친애감을 느꼈다. 숙직 선생님도 현저동에 대해 뭘 좀 아는지 이런 약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약도를 보면서 벌써 대강 짐작이 갔다. 찾을 자신이 있었지만 종숙이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 하고 그냥 가 보자고만 했다. 왠지 그 동네에 대해 아는 척하기가 싫었다. 수치감 같은 것하고는 달랐다. 찾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전차가 다닐 때라 영천까지는 쉽게 갔지만 집 찾는 덴 과연 오래 걸렸다.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고 밤이라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이 더 꼬여 보였다. 나는 종숙이한테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처럼 굴면서 혹시 그 애가 그 동네를 흉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안 들어오셨다고 했다. 선생님 댁은 아주 조그만 일각대문 집이어서 대문 밖에서도 그 구차한 살림 형편이 다 들여다보였다. 사모님한테 찾아온 뜻을 전하면서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엄마한테는 늦게 온 걸 야단맞았지만 다음 날 아침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는 뭘 그까짓 일로 집까지 찾아왔었느냐고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 후 선생님과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성립된 것처럼 느꼈고 그건 현저동을 공유한 데서 오는 연대감이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송사묵은 해방을 전후한 십여 년 동안 그닥 재미는 없지만 씹을 맛 있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온 소설가였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장차 소설을 써 보는 게 꿈이었던 문학 소녀 때 진짜 소설가가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해 왔다는 건 가슴 울렁거리는 사건이었다. 어떡하든지 그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작은 칭찬도 잊지 않고 인정의 표시로 간직하게 되었고, 그걸 훗날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비빌 언덕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이렇듯 나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 문학사에 오르내리는 게 반가우면서도 성명 가운뎃자가 실종된 채인 게 서운하고 죄송스럽더니만 이제 떳떳이 복원된 걸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이 좋아지긴 과연 좋아졌구나. 나는 송사묵이란 이름과 함께 복원된 이름들을 훑어내리면서 우선 세상 칭송부터 했다. 그러나 내 만족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복원된 건 그의 성명 삼자 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 문학선의 표제는 월북 납북 문인 선집으로 돼 있는데 송사묵 선생은 사형을 당한 것이지 월북을 한 것도 납북당한 것도 아니었다. 월북이나 납북이 사형보다 듣기에도 좋고, 보다 희망을 걸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분의 진상은 아니었다. 망가지고 흩어진 걸 복원하는 데 있어서 제 조각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딴 조각으로 메운 걸 진정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중략) 비록 방대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그분이 남긴 문학 을 몽땅 모아논 자리라면 의당 그분의 생애도 정직하게 복원돼야 마땅했다. 그건 내 감수성이 가장 순수했을 때 존경과 동경을 바쳤던 분에 대해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경의 방법이었다. 그분은 사람이고 문학이고 요사스러운 걸 가장 싫어했다. 그 때는 국어 시간에 문장 지도도 했었는데 제발 못 써도 좋으니 요사만을 떨지 말기를 엄하게 경계하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겉멋, 허영, 장식으로서의 여고생 문학 취미도 적당히 봐주지 않던 그분이 철 지난 늙은이들이 꾸미는 이 요사스러운 장난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도 유난히 맑고 진국스럽던 그분의 눈빛이 생각 났다. — [박완서]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1)
[B] 1950년, 나는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었고, 황금 같은 고 3 시절은 그해에 한해서 9개월밖에 안 됐다. 3월 말에 학년을 끝내고 4월에 학기 초이던 일제시대의 학제가 해방이 된 8월을 기준으로 구미의 제도처럼 8월에 학년을 끝내고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도록 바꾼 것이 49년까지 통용됐었다. 그걸 원래대로 3월 학기 말로 환원시키기 위한 과도 조치로 50년도에는 학기를 3개월 단축해서 5월로 하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 졸업반이어서 5월 졸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에 신식 교육제도가 들어오고 학제라는 게 생기고 나서 5월 졸업은 우리가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는 엄동설한에 들어 있는 입시와, 꼭 을씨년스러운 늦추위가 끼는 요즈음 입학과 졸업을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 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도합 십이 년간의 교육 기간 중 처음으로 우등상이라는 걸 받으면서 졸업을 했다. 엄마는 물론 오빠, 올케, 숙부, 숙모가 다 졸업식에 참석해 축하를 해 주었고 나는 속으로 기고만장했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거뜬히 합격한 뒤였다. 지금의 인문대와 자연대를 합쳐서 그때는 문리대라고 했는데,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풍조는 전쟁 후에 생겨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 잔재랄까, 순수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승할 때라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처하며 기고만장할 때였다. 힘 안 들이고 합격을 하고 보니 머리가 붕 뜨는 것처럼 교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교에선 대학에 지원하는 비율이 높지 않아서였는지 입시를 위한 수업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모의고사를 두어 번 본 것 빼고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알아서 한 수험 공부는 종로서관 집 딸인 김종숙한테 예상 문제집을 빌려 본 것이 전부였다. 꽤 두꺼운 문제집이었는데 아마 지질이 형편없는 갱지여서 더욱 부피가 나갔을 것이다. 나 말고도 뒤에 기다리는 아이가 있어서 사나흘 집중적으로 보았다. 마치 소설책 돌리듯이 돌리고 난 책을 그 후에 다시 책방에 갖다 팔았는지 어쨌는지 그 뒷일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음씨 좋은 친구 덕으로 그 책을 한 권 떼고 나니까 배운 것이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 집 형편이 그런 책이 필요하다면 못 사 줄 형편은 아니었는데도 안 사 달란 것은 시험공부 안 하는 것처럼 굴다가 쓰윽 합격해 보이겠다는 유치한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학시험은 4월 말경이었는데, 그때가 또한 문리대 근처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지금은 마로니에공원으로 변하고 개천도 복개되었지만 그때는 동숭동 초입부터 이화동까지 길게 대학천이 흐르고 대학천을 향해 개나리가 눈부시게 늘어져 있고, 마당에선 벚꽃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마로니에가 움트고 있었다. 전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시절이라 입학원서 낼 때나 시험 칠 때나 문리대 정문을 빠져나오면 곧장 길을 건너 의대 정문을 지나 대학병원 정문으로 해서 원남동으로 나가 전차를 탔다. 의대와 대학병원이 연결된 길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에 꿀 수 있는 온갖 황홀한 꿈 때문에 그 길이 그렇게 좋았는지, 그 길의 나무와 꽃과 풀과 훈풍이 그렇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 그 길은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매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그 계절에 나를 매혹시킨 것은 자유에의 예감이었다. 중학생에서 대학생이 된다는 것도 온갖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나는 엄마로부터의 자유까지를 이미 예비해 놓고 있었다. 시집이나 가면 또 모를까, 처녀 시절에 엄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꿈이나 꿔 봤을까. 아니 꿈도 안 꿔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건 내 꿈 속의 꿈, 가장 내밀한 욕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어 바로 목전에 예비돼 있었다. 그 엄청난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악용, 선용, 남용, 절제 아무거나 다 매혹적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그것과 더불어 공모하리라. 그 꿈이야말로 장미와 라일락과 모란을 피게 하는 5월의 햇빛보다 더 찬란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 [C] 졸업식은 전통적인 격식대로 지루했으나 식후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풍선처럼 부푼 것이었다. 송사나 답사는 구태의연하게 회고와 감상을 늘어놓았으나 아무도 회상 따위에 잠기려 들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분명 4년제 여고에 입학하였는데, 해방과 더불어 변경된 학제로 부당히도 2년씩이나 더 옹색한 제복과 완고한 교칙 밑에 억류당했던 것이다. 부당하게시리…… 억울하게시리……, 어른의 세계에 2년씩이나 지각을 하다니. 이 엄청난 시간의 낭비……. 티끌만 한 미련도 없이 다만 성급히 앞일만 생각하며 부산스레 설레는 것이었다. — [박완서]목마른 계절(세계사, 2012)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국립서울대학교로 개교하였다. 서울대학교 터는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24에 위치하였으며 1975년에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박완서는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는데,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였고 박완서가 이를 받아들였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목마른 계절』의 'S대'는 서울대학교를 가리킨다. '하진'은 학교에서 자고 있던 '민준식'과 우연히 마주친다. 친구 '박향아'의 약혼자인 '민준식'이 '하진'에게 입맞춤하고, '하진'은 생경한 관능의 감각에 당황한다. — S대의 강의가 전폐하고, 학도호국단 주최의 학생회가 열려 학교를 끝까지 사수하자는 비장한 결의가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1학년에게는 귀가조치가 취해진다. '하진'은 출정하는 국군과, 남으로 피난 내려오는 행렬을 보며 전쟁의 불길함을 느낀다. — S대의 건물 담벼락에 전쟁 보도사진이 전시된다. 학살과 파괴의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며 군중은 분노와 복수를 다짐하는데, 그러한 장면을 본 '하진'은 안타까움과 외로움을 느낀다. ○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1950년 '나'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