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A] 국민학교 때,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개성에서 20리 밖 촌에 사시는 우리 할머니는 손녀를 보러 개성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나는 우리 반이 역 앞 광장에 정렬하기 전서부터 할머니를 보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뻣뻣하게 풀을 먹인 당목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머리엔 베 보자기에 싼 보따리까지 이고 계신 할머니가 창피해서 나는 끝내 모르는 척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단념하지 않으시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이름을 일본말로 바꿔 부르던 일제시대라 “완서야, 완서야” 하는 할머니의 외침을 내 이름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와서 허탕을 칠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서투른 발음으로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의 혀 짧은 발음이 어찌나 우습고도 슬프던지 나는 “할머니” 하면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박완서]할머니 [A] 우리는 개성역 광장에 네 줄로 정렬했다. 그때도 나는 앞에 선 아이의 뒤통수만 보고 한눈 한번 안 팔았다. 이때였다. 어디서 “완서야, 완서야” 하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러나 마음 모질게 먹고 나서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곧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 부를 때라 ‘완서’가 내 이름이라고 선뜻 알 만한 아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다. 나는 어서어서 선생님이 우리들을 이끌고 어디론지 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할머니는 마침내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보꾸엔쇼야, 보꾸엔쇼야.”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입에 담으신 최초의 일본말이자 마지막 일본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 발음이 오죽했겠는가.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는 목놓아 울고 싶도록 슬프게 들렸다. 아무도 할머니의 그 괴상한 발음이 내 이름이란 걸 알아듣기 전에 나는 슬픔과 미움과 사랑이 뒤죽박죽된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로 뛰어갔다. [박완서]할머니와 베보자기 [B]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 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 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나올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 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을 점검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할머니는 풀을 세게 먹여 다듬은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뻗쳐 입고 머리에는 베 보자기에 싼 커다란 임을 이고 있었다. 수치감과 분노로 화끈해진 얼굴을 깊이 숙이고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복순이의 손을 꼭 붙들었다. 내 조선말 이름은 복순이밖에 누가 알랴 싶었다. 할머니한텐 좀 안됐지만 눈 딱 감고, 귀먹은 셈 치고 이 고비를 넘기자, 그런 속셈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이 애 저 애 붙들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자 할머니는 어디서 배워 왔는지 이번엔 일본말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아무도 못 알아들을 혀 꼬부라진 어눌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나는 더는 참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그 어려운 발음을 시킨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그럴 땐 우는 게 유일한 내 재주였다. 나는 “할머니!” 하면서 그 뻣뻣한 치마폭으로 달려들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하면서 연방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몇천 리 밖에 떨어져 지낸 손녀와 할머니처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엔 다시 작은 보따리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송편이었다. 필경 며느리를 닦달질해 밤새 빚어 새벽에 쪄 가지고 달려오신 듯 말랑한 송편에선 솔 내와 참기름 내가 물씬 났다. 그러나 나는 오직 아이들 보기에 창피하단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그 고역스러운 시간을 면하고 싶었다. 흐트러진 열을 바로 세우려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할머니는 한 보따리는 선생님 드리고, 한 보따리는 서울로 가지고 가서 작은집과 나누어 먹고, 또 한 보따리는 아이들하고 나누어 먹으라고 송편이 세 보따리인 까닭을 설명해 주고 비로소 작별을 아쉬워했다. 다행히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리를 삐어서 여행에 따라오지 못하고 딴 반 선생님이 우리를 인솔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혹시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싶어 할까 봐 그 얘기를 재빨리 할머니 귀에 속삭이고는 어서 가시라고 밀어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저만치 떨어져서 우리가 정렬하여 차례로 역 광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걸 의식하며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행히 복순이가 말없이 나에게 덧붙여진 짐을 같이 들어 주었다. 만월대, 선죽교 등 정해진 코스를 도는 동안 내내 우울했다. 점심을 먹을 때 나는 그 송편을 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한테 드리지도 않았다. 다 큰 나이라 내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긴 데 대해 반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기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우울하다는 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반성과 우리 집안은 왜 이럴까 반발하는 마음이 반반씩이었다. 친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과 과보호가 점차 나를 옥죄는 것 같아 그게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밤에 도착한 경성역엔 또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에게 송편 보따리를 인계할 때까지 꾸준하게 그걸 들어 주고 내 배배 꼬인 심보를 이해해 준 복순이에게도 단 한 개의 송편도 맛뵈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먼저 남대문통 작은숙부네에 들러서 송편 보따리를 끌러 두 집이 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하면서, 작은숙부 내외가 큰숙모의 노고와 솜씨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민학교 마지막 수학여행은 이렇게 우울하게 끝났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