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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단편소설 「나이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시상식은 1994년 10월 4일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렸다. 방상훈 조선일보사장은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이래 꾸준한 성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던 작가가 동인문학상 25회 수상자로 선정돼 이 상의 권위를 더욱 빛내주었다”며 시상했다. 최종심사를 맡은 평론가 김윤식, 유종호와 소설가 서기원, 김승옥, 정소성, 김향숙 등 문인, 문화계 인사 백 여 명이 참석했다. ○ 수상소감 박완서, <계면쩍은 걸 어쩝니까>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 소감, 1994) 무더운 날이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내 생전에 이렇게 견디기 힘든 더위는 처음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나면 다음날은 더 기온이 올라가곤 한다. 전생애의 경험을 걸고 증거하고 싶은 게 겨우 금년 더위가 사상 초유라는 것밖에 없는 내 나이가 손자들보기엔 얼마나 유구해 보일까. 아마 관상대의 역사만큼이나 길어보였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육십이 넘은 사람은 왜 살고 있는지 이상하게 여기곤 했었다. 죽을 일밖에 안 남아 있는 나이는 어린 마음에 불쌍하고 두렵게 비쳤다. 역시 더운 날, 가장 더운 시간에 동인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솔직히 곤혹스러웠다. 상이 비켜갈 때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문단 경력하고도, 작품에 대한 겸양이나 자만하고도 상관이 없다. 순전히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나이에 다시 상 받는 자리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주책스러워 보일것인가, 자신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면하고 싶었지만 면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부라는 말은 즉시 떠올랐지만 그런 말은 심사 위원이나 주최측을 황당스럽게 할 것 같았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아니꼽게 보이기 십상인 껄끄러운 말이었다. 요컨데 면하되 우아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깜쪽같이 면하고 싶었나 보다. 그런 말을 찾느라 우물대는 사이 상은 수락된 것이다. 우물대는 것처럼 편리하고 음흉스러운 짓은 없다. 상을 우물우물 받아들이고 나서도 줄창 상에 짓눌리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뒤늦게 사양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 즉시 사양이란 말만 떠올랐어도 상을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 사양하겠어요. 상은 젊은 사람이 타야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 흔한 말이 안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내 의식의 밑바닥에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잠재돼 있었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한 마디 말에 운명을 맡겼다. 내 소설이 쉽게 읽힌다고 흔히들 말한다. 나는 독자들을 행간에 끌어들여 머뭇거리게 하고 싶은데 그냥 술술술 읽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좀 쓸쓸하다. 그러나 쉽게 읽히니까 쓰는 것도 쉽게 쓴 줄 아는 소리를 들으면 더 쓸쓸하고 슬퍼지기까지 한다. 수상작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 대해선 그런 말을 더 많이 들었다. 전화로 떠는 수다로 일관돼 있으니까, 쓰기가 훨씬 편했을 거라고, 하루나 이틀쯤 걸리지 않았겠느냐고, 걸린 시간까지 추측들을 한다. 소설을 쓸 때 특히 단편 소설을 쓸 때 내가 가장 참담한 고생을 하는 건 기발한 줄거리나 심오한 메시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말 찾기이다. 거기 딱 들어맞는 운명적인 한 마디를 찾기 위해 몇날 며칠을 헤맬 적도 많다. '거부'에서 '사양'까지 몇 시간씩 걸리는 실력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단편 한 편 쓰고 나면 몸에 진이 다 빠져 버린 것처럼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릇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한 놀고 먹을 수는 없고 뭔가 일을 하긴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일이 그 짓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짓에 진을 뺄 때 가장 살맛이 나니 그만하면 운명적이라 할밖에 없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현역이고 싶다고 흰소리 친 적까지 있는데 이즈음엔 그 생각도 바뀌고 있다. 만약 노망이 들고 나서도 쓰기를 멈추려들지 않는다면 얼마나 추악한 노후가 될 것인가. 보통 노인의 노망은 가정 내의 고통에 머물지만 작가의 노망은 사회적인 웃음거리와 지탄을 못 면할 것이다. 노망이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던가 그런 연유로 쓰는 일에 노익장(老益壯) 증세가 올까 봐 진정코 겁이 난다. 노망 들 걱정만 빼면 이순이 넘은 나이도 살맛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날도 많았건만 들끓는 풍파를 헤치고 겨우 도달한 것 같은 이 평화와 자유도 지키고 음미할 만한 경지라고 생각한다. 과찬이나 과공도 평화를 해친다. 늙으면 조금 모자라게 먹어야 속이 편한 것처럼 칭찬이나 공경도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것이 훨씬 속 편하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부터라도 과녁이 되는 것보다는 언저리에 수긋이 비켜나 있는 것이 좋다. 쓸쓸하기 때문이다. 노후의 평화의 진미는 쓸쓸함 속에 있다. 수상 소감이라고 잔뜩 노티만 내서 미안하다. 계면쩍어서 그런다고 양해해 주길 바란다. —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조선일보사, 1994.
1980년, 단편소설 「그 가을의 사흘동안」으로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1980년 12월 29일 오후 2시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렸다.
1997년,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제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완서는 “기록으로 남은 한 시대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으니 숨결로 가 닿아 죽은 이들의 명을 이어주고 살아남은 슬픔을 달래고 싶었습니다.”라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1997년 11월 28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다.
2006년 한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제16회 호암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2006년 6월 1일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이루어졌다. ○ 수상소감 저에게 이런 큰 상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에게 떠오르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개축을 하고 있는 신세계백화점 자리입니다. 제 작품 나목의 배경이 되었던 미군 PX 자리가 바로 거기였고 저의 남편이 1966년 까지 조명상점을 하던 곳도 바로 동화백화점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삼성이라는 회사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저의 남편은 대기업에 밀려 청계천으로 가게를 옮길 수 밖에 없었죠. 그동안 우리 나라는 급속한 수직이동을 하면서 성장해왔고 바로 이병철 회장님과 삼성기업이 그 성장의 주역이었습니다. 저는 나목을 발표한 이래 36년간 끊임없이 글을 써왔습니다. 그 동안 제 작품들은 문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많은 문학상도 받았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 호암 이병철 회장님이 주는 상을 받는 감회는 남다릅니다. 큰 상금을 타는 것이 이 나이에도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작품의 발원지였고 제 남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장소에서 저에게 주는 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삼성의 번영과 부는 기적과 같습니다. 저는 역사와 번영의 물결 속에서 소외되어가는 개인의 존엄성을 찾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에게 이 상이 주어진 뜻도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는 정말 좋은 것이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 상을 저에게 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에 『나목』으로 당선된다. 박수근 유작전을 본 뒤, 강렬한 증언의 욕구에 사로잡힌 박완서는 원래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응모하려 했으나 소설로 방향을 튼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허가 받은 거짓말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습작도 없이 1200매를 써냈으며, 상금으로 받은 50만 원으로 남편, 막내 아들과 속리산 여행을 다녀왔다. ○ 수상소감 “어쩌면 서투른 글을 쓰기 위해 서투른 아내, 서투른 엄마가 되려는 거나 아닐까 그럴 수는 없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계속 좋은 주부이고 싶다. 나는 이 두 가지에 악착같은 집착을 느낀다.” —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부록
1981년, 단편소설 「엄마의 말뚝 2」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당시 심사위원으로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2」를 적극 추천하였으며 선정 이유 또한 직접 썼다. ○ 수상소감 박완서, <미처 참아내지 못한 통곡>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 1981) 먼저 저에게 이 과감한 상과 이 기쁜 자리를 마련해주신 문학사상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저를 축하해 주시기 위해 이 자리를 함께 해 주신 여러 어른들과 벗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문단이란 데를 어림짐작으로 등단한 지가 11 년이 되었고 그동안 다작이라 우려해 주시는 분도 계실 만큼 부지런히 써왔읍니다. 그러나 이번 <엄마의 말뚝 2>에 상을 주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하필 그 작품을 하고 흠칫 놀라면서 부끄러웠고, 피하고 싶었고, 숨어버리고도 싶었읍니다. 결코 제가 상을 우습게 알 만큼 고고해서가 아닙니다. 의례적인 겸손 때문도 아닙니다. 작가는 작품을 쓸 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미 그의 몫이 아닙니다. 이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에 대해서도 저는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쓰고 나서 곧 참지 못하고 쓴 것을 후회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았어야 하는 것을, 정 못 참겠으면 울 안에서의 통곡, 통곡으로 끝냈어야 하는 것을……저는 그작품이 활자가 되어 돌아다니는 동안 줄창 이렇게 불편했고 불안했읍니다. 그것은 저에겐 소설이기 이전에 한바탕의 참아내지 못한 통곡 같은 거였읍니다. 저는 통곡 같은 거였읍니다. 저는 통곡을 참아내지 못한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고 쓴다는 것은 과연 뭘까 하는 근원적이며 주기적인 질문으로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닦달질해야 했읍니다. 소설의 거리〔材料]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 버림받은 쓰레기 속에 외면당한 남루 속에 감추어진 악한 것 속에서 소설의 거리는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게 오다가다 우연히 얻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삶에 대한 꾸준한 통찰력, 따뜻한 연민, 때로는 열정적인 애정에 의해서만 그것을 볼 수가 있고 주워올릴 수가 있읍니다. 문제는 주워올린 다음입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선 주워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구성해야 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작가의 그런 이중성이 가장 철저히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이번 수상작을 쓰고 나서 자신에게 정떨어지고 수치감마저 느꼈던 것도 자신의 어머니의 현재 진행중인 참담한 고통을 거리로 삼았대서가 아닙니다. 차마 그걸 거리로 삼아 소설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어머니의 현재 진행중인 고통과 고무에 대해 여유를 둘 수 있었고 객관적일 수 있었고 냉담할 수 있었다는, 좋게 말하면 작가적 근성, 나쁘게 말하면 말 못할 독종에 대한 혐오였읍니다. 그러나 역시 그 이중성은 이 작품에서 너무도 허술했읍니다.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감출 수가 없었고 그것이 도리어 저에겐 한가닥의 위안이 되었댔었읍니다. 우리 겨레의 분단은 이제는 하나의 기정 사실입니다. 분단은 오래전에 피 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되었고 통일을 꿈꾸지 않은 지도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통일이란 말이 도처에 범람하고 있읍니다만 산 채 분단된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구호로서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 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흘리게 할 수밖에 없읍니다. 고통스럽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읍니다. 토막난 채 아물어 버리면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구호에 봉사하느냐, 이런 숨겨진 처절한 아픔 편에 서느냐는 협로에 서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부당하게 겪는 아픔과 슬픔, 몸부림, 그러면서도 결코 단념할 줄 모르는 그들의 꿈, 그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정신을 쥐어뜯어야 할 만큼, 우리를 일률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구호의 최면술은 날로 막강해지고 있는거나 아닐는지요. 아물었으되 피 흘리고 있음을, 딱지 않았으되 곪고 있음을, 잘 차려 입었으되 벌거벗었음을, 춤추고 있으되 몸부림치고 있음을,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게 문학이 숙명처럼 걸어진 형벌이자 자존심이라면 저도 잠시 한낱 비통한 가족사를 폭로한 것 같은 수치감에서 벗어나 제 선배 수상자들이 그랬듯이 이 상 앞에서 늠름해지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문학사상사 여러분께 사과드리고 싶은 건, 수상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여태껏 앞서 말한 이런 저런 까닭에다 타고난 재미없는 성격으로 해서 별로 기쁨을 나타낼 줄 몰라 애써 큰 상을 마련한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나 하는 겁니다. 아이들을 여럿 기르다 보니, 더러 상장 같은 것도 타왔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체 저만큼 밀어 놓았다가도 아이들이 안 보는 데선 후딱 잘 챙겨서 소중하게 간수해 놓은 게 아이들이 모두 어른된 지금까지도 제 세간 속 가장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 비밀스러운 기쁨과 자랑이 돼주고 있읍니다. 이 상 역시 제 마음자리 가장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소설 쓰는 일에 바치는 수고에 지쳤을 때, 그 일이 허망하고 허망해서 망막해졌을 때 꺼내 볼 겁니다. 그때 그것은 한가닥 빛으로든, 모진 채찍으로든, 저에게 큰 용기가 되어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엄마의 말뚝 2』, 문학사상사출판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