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 삼선교, 신혼집이 종로 5가로 가까웠기에 친정 나들이를 자주 다녔다. 시장에 나가는 올케를 대신해 박완서가 조카들 소풍에 꼭 따라갔다. [B] 친정나들이만 해도 그렇다. 내가 시집으로 아주 오던 날 엄마가 목 놓아 울었다는 소리를 올케한테 들은 바 있기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친정나들이를 해서 내 얼굴을 많이 보여드리는 게 엄마의 상실감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정나들이만 다녀오면 시어머니의 표정이 샐쭉했다. 팥빵이나 인절미 등 잡술 것을 사가지고 들어가면 표정을 풀어드릴 수 있다는 요령이 생겼지만 엄마까지도 점점 자주 오는 딸을 반기지 않자 나만 속이 상하게 됐다. 내가 시집살이를 무난하게 유지하는 건 엄마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기특한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친정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건 목적 상실처럼 타격이 되었다. 그럴 때 만만한 건 남편밖에 없었다. 당신만 외아들이냐, 나도 귀한 외동딸이다. 귀한 외동딸은 안따노 오까아상을 모시고 사는데 당신은 우리 엄마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남편을 들볶았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지만 능글능글한 데도 있었다. 그럼 바꿔 살까 라고 나를 약 올렸다. 싸움이 안 되는 입씨름 끝에 나 대신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처갓집에 들러 남자 손이 필요한 일을 도와드리고 엄마의 말벗도 돼드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는 약속을 잘 지켰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바꿔서 효도하긴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에서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로 청승맞게 사위 혼자 오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자 일단 안심은 하면서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아이고 이 한심한 철부지야. 사위는 백년손이란 소리도 못 들었냐 혼자서 우두커니 와 앉았으면 내외간에 무슨 일이 있었나, 가슴 먼저 내려앉고, 입 짧은 사위 대접하는 것도 큰일이고, 이게 웬 고생인가 싶더니만 네 짓이었구나. 당장 그만두거라. 시집갔으면 저나 시집살이 잘할 일이지 친정 에미까지 시집살이시킬 일 있다던.”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C] 나는 지금도 조카의 첫 소풍날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국민학교 일학년 첫 소풍은 창경원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줄창 조카를 따라다니기로 하고 나는 점심을 싸가지고 나중에 가서 창경원 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는 장소는 연못가로 하여 행여 어긋나는 일이 있을까봐 나는 용의주도하게 남편이 결혼 전에 차던 손목시계까지 어머니 손목에 채워드렸다. 그러고도 나는 어머니가 못 미더워 골백번도 더 “열한시 정각에, 연못가” 소리를 했더랬다. 그런 내가 한 시간이나 더 늦게 가고 말았다. 도시락도 요리책을 봐가며 좀 멋을 부려봤지만, 내 모양을 내는 데 분수없이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새로 했고, 화장도 정성 들여 했고, 옷도 거울 앞에서 몇 번을 갈아입어봤는지 모른다. 그때만 해도 내 용모에 어느 만큼은 자신이 있을 때라 나는 군계일학처럼 딴 엄마들 사이에서 뛰어나길 바랐었다. 그래서 조카까지가 그런 우월감으로 엄마 대신 고모라는 서운함을 메울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다가 그만 한 시간이나 지각을 하고 만 것이다. — [박완서]카메라와 워커(한국문학,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