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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딸을 낳은 뒤, 충신동에서 보문동으로 이사한다. 이 집에서 20년 가까이 거주했다. 당시에는 신설동이었으나 후에 보문동으로 편입되었다. ○ 딸 호원숙의 회고 행정 구역상로는 동대문구 신설동 205의 54번지. 55평 대지에 건평이 서른 평쯤 되는 전형적인 ㄷ자형 한옥이었고 춘양목으로 지어진 굴도리집이었다. 어머니는 대청마루에서 자랑스러운 듯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충신동 집에 비한다면 대궐이었고 골목도 시원시원했다. 전찻길에서 좀 멀긴 하지만 교통도 좋고 근처에는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공간도 많고 논과 밭도 있었다. 꽤 넓은마당에는 큰 장독대와 일본식 목욕탕도 있었다 둥근 가마솥처럼 생긴 쇠로 된 욕조에다 나무깔개를 하면 목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문화 생활을 하는 듯했다. 어머니가 선택한 집이었고 유난히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마당 가운데에다 화단을 만들어 샐비어와 칸나를 심었다. 어머니는 뜰 가꾸기에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우리집 화초는 윤기가 났고 빛깔이 더 화려해보였다. — [호원숙] 행 복한 예술가의 초상(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2)
친정이 삼선교, 신혼집이 종로 5가로 가까웠기에 친정 나들이를 자주 다녔다. 시장에 나가는 올케를 대신해 박완서가 조카들 소풍에 꼭 따라갔다. [B] 친정나들이만 해도 그렇다. 내가 시집으로 아주 오던 날 엄마가 목 놓아 울었다는 소리를 올케한테 들은 바 있기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친정나들이를 해서 내 얼굴을 많이 보여드리는 게 엄마의 상실감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정나들이만 다녀오면 시어머니의 표정이 샐쭉했다. 팥빵이나 인절미 등 잡술 것을 사가지고 들어가면 표정을 풀어드릴 수 있다는 요령이 생겼지만 엄마까지도 점점 자주 오는 딸을 반기지 않자 나만 속이 상하게 됐다. 내가 시집살이를 무난하게 유지하는 건 엄마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기특한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친정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건 목적 상실처럼 타격이 되었다. 그럴 때 만만한 건 남편밖에 없었다. 당신만 외아들이냐, 나도 귀한 외동딸이다. 귀한 외동딸은 안따노 오까아상을 모시고 사는데 당신은 우리 엄마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남편을 들볶았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지만 능글능글한 데도 있었다. 그럼 바꿔 살까 라고 나를 약 올렸다. 싸움이 안 되는 입씨름 끝에 나 대신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처갓집에 들러 남자 손이 필요한 일을 도와드리고 엄마의 말벗도 돼드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는 약속을 잘 지켰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바꿔서 효도하긴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에서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로 청승맞게 사위 혼자 오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자 일단 안심은 하면서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아이고 이 한심한 철부지야. 사위는 백년손이란 소리도 못 들었냐 혼자서 우두커니 와 앉았으면 내외간에 무슨 일이 있었나, 가슴 먼저 내려앉고, 입 짧은 사위 대접하는 것도 큰일이고, 이게 웬 고생인가 싶더니만 네 짓이었구나. 당장 그만두거라. 시집갔으면 저나 시집살이 잘할 일이지 친정 에미까지 시집살이시킬 일 있다던.”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C] 나는 지금도 조카의 첫 소풍날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국민학교 일학년 첫 소풍은 창경원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줄창 조카를 따라다니기로 하고 나는 점심을 싸가지고 나중에 가서 창경원 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는 장소는 연못가로 하여 행여 어긋나는 일이 있을까봐 나는 용의주도하게 남편이 결혼 전에 차던 손목시계까지 어머니 손목에 채워드렸다. 그러고도 나는 어머니가 못 미더워 골백번도 더 “열한시 정각에, 연못가” 소리를 했더랬다. 그런 내가 한 시간이나 더 늦게 가고 말았다. 도시락도 요리책을 봐가며 좀 멋을 부려봤지만, 내 모양을 내는 데 분수없이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새로 했고, 화장도 정성 들여 했고, 옷도 거울 앞에서 몇 번을 갈아입어봤는지 모른다. 그때만 해도 내 용모에 어느 만큼은 자신이 있을 때라 나는 군계일학처럼 딴 엄마들 사이에서 뛰어나길 바랐었다. 그래서 조카까지가 그런 우월감으로 엄마 대신 고모라는 서운함을 메울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다가 그만 한 시간이나 지각을 하고 만 것이다. — [박완서]카메라와 워커(한국문학, 1975)
1951년 겨울, 오빠와 숙부를 떠나보내고 가장이 된 박완서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군 PX 초상화부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후에 『나목』의 주인공이 될 박수근 화백을 만난다. [B] 화가들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초상화부 책임자가 되었다. 다섯 사람의 화가들이 나를 짝짝짝 박수로 맞아 주었다. 화가들은 벌써 이 군의 존재를 잊은 듯 허 사장에게 진작 여점원을 쓰셨더라면 초상화부가 더 잘될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며, 허 사장의 이번 인사를 추켜세웠다. 허 사장은 나를 책임자라고 했는데 화가들은 나를 점원 이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데가 잘되고 못되는 건 그림 솜씨에 달렸지, 점원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간판장이들이 꼴값하고 있다고 가소롭게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고, 그동안은 내 생애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동안이 되었다. 나는 초상화부 책임자가 되자 파자마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가부터 봤다. 특별 주문은 치수에 따라 얼마든지 추가할 수가 있었지만, 비치된 규격품은 6달러, 4달러, 3달러짜리 세 종류밖에 없었다. 미군하고 친해져서 미제 물건 사다 달라고 부탁할 것만 아니라면, 정가 붙은 물건 파는 데 그렇게 많은 영어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부가 바뀌었다고 별로 겁날 게 없었다. 그러나 온종일 앉았어도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제 발로 찾아오는 지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단 한 명도. 이틀째가 되니까 뒤에서 화가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 군이 맡아 놓은 주문이 밀려 있어서 놀지는 않는데도 곧 일감이 끊어지게 될까 봐 불안한 거였다. 내가 잘못 걸려도 된통 잘못 걸린 거였다. 초상화부는 그 물건이 필요해서 사러 오는 사람한테 파는 일반 매장하고 달랐다.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미군을 적극적으로 꼬셔야만 비로소 한 건 올릴 수 있는 장사였다. 허 사장이 사람을 잘못 본 거였다. 캔 아이 헬프 유우 소리 한마디를 하려도 머리에 먼저 철자법이 떠올라야 혓바닥이 움직이게 돼 있는, 나처럼 둔하고 꼬인 언어의 회로를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우리말을 쓰는 재래시장에서도 장사를 잘하고 못하고는 정직이나 박리다매로 결판이 나는 게 아니지 않나. 오장육부를 빼 놓고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 수 있는 비위와 입심이 있어야 장사는 해 먹게 돼 있는데 초상화부도 마찬가지였다. 안 살 사람을 사게 한다는 건 제 나라 말로도 고도의 화술을 요하는 일이었다. 초보적인 외국어 실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B] 어느 날 박씨라는 체격이 듬직한 화가가 화집을 하나 끼고 나왔다. 나는 한 번도 화가들 개개인에 대해 개별적인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간판장이들로 족했고, 이름도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다행히 다섯 명의 화가들은 성이 다 달랐다. 박씨, 황씨, 장씨, 노씨, 마씨였다. 성씨만으로 구별해 부를 수 있으니 그만이었다. 박씨도 다섯 명의 간판장이 중의 하나일 뿐 그만의 특색이나 사건으로 인상에 남을 만한 건수는 없었다. 나는 박씨가 두툼한 화집을 끼고 나오는 걸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꼴값하고 있네. 화집만 끼고 다니면 간판장이가 화가 되나. 뜻밖에도 박씨는 나를 생각하고 그 화집을 가지고 나온 거였다. 한산한 오전 시간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나한테로 화집을 들고 왔다. 일제 때 선전에 입선한 작품을 모은 화집이었다. 그는 미리 특정의 페이지를 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자기 그림이라고 했다. 농가 여자들이 마주 보고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특선이나 무감사 같은 특별한 그림은 아닌 듯했다. 꽤 크게 나온 그림도 있었는데, 그의 것은 명함만한 크기로 흑백으로 나와 있었다. 그 밑에 들어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처음으로 나는 그가 박수근朴壽根이라는 걸 알았다. 박씨라는 성 외에 이름을 더 알았다 뿐, 그전부터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진짜 화가가 우리 초상화부에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우선 그동안 내가 너무 버르장머리 없이 군 게 무안했다. 그는 그 화집을 내 책상 위에 놓고 갔다가 저녁에 퇴근할 때서나 가져간 것 외에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왜 그걸 나에게 보여 줬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막연히 나의 신경질과 오만불손에 대한 그 나름의 항거, 최소한의 꿈틀거림이 아닐까, 정도로 추측했다. 너만 잘난 게 아냐, 여기 잘난 사람 또 있어,라고 말해 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 후 나는 다시는 지진아 지도하는 국민학교 여선생 같은 짓거리를 안 하게 됐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박수근이가 다른 화가하고 다른 점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눈은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진지하다기보다는 덤덤했다. 아무리 봐도 특출한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특출이란 여러 평범 중에서 돌출되는 점이어야 하는데, 그는 어디서도 존재가 드러나기에는 불리한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평균치의 한국인 얼굴에다 목소리는 낮았고, 남을 웃기는 재담도 할 줄 몰랐고, 신랄한 독설가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사교술도 없었지만 남을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점심 먹으러 나가자고 하면 미적미적 따라나섰지만, 먼저 바람을 잡는 일은 없었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C] 그도 그럴 것이 네 명의 환쟁이들이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이 초상화 그리기가 실상 이만치라도 바쁜 것은 고작해야 미군들 봉급날인 월말을 전후해서 일주일쯤이지 그 밖의 날은 그저 심심풀이나 면할 정도였다. 그림 그린 만큼 보수를 따져 받는 그들은 놀지 않고 한 장이라도 더 맡아 그리려고 비굴하도록 내 눈치만 살피는 처지였다. 실은 나도 환쟁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짜증 비슷한 감정이 뱃속에서 보깨고 있어서 좀 심술궂게 굴었다 뿐이지 그들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통틀어 환쟁이라 부른대서 가끔 최 사장은 그렇게 사람 깔보면 못쓴다고 나를 나무라지만 부르기 편할뿐더러 그 이상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호칭을 아직 생각 못 해냈다 뿐이지 털끝만큼도 그들을 경멸할 생각이 있어서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내가 누굴 조금이라도 경멸한다면 아마 내가 깍듯이 최 사장이라 부르고 있는 최만길崔萬吉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미8군 PX 아래층은 서쪽으로 3분의 1쯤이 한국물산 매장으로 되어 있어 그 경영은 한국인 위탁업자들이 맡아 하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해먹을 것이 궁색한 전쟁 중이라 그 위탁판매장 맡아 하기도 웬만한 백이나 수완 없인 어림없다는 게 최 사장의 말이었고, 앞을 다투어 갖가지 업종—수예품, 유기그릇, 대그릇, 고무신, 피혁제품, 귀금속—이 다 들어앉은 뒤에 엉뚱하게도 밑천 한 푼 안 드는 초상화 간판을 들고 들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상술이 아니라는 게 최 사장의 자부였다. 아무튼 휘황한 PX 아래층 중앙부에 초상화부를 차리고 간판쟁이들을 모아다가 밥벌이를 시켜줍네 자기도 그 덕에 약간의 치부도 하고 내 월급도 주고 또 사장이라 불리기를 한없이 갈망하고 즐기는 최만길에게 난 가끔, 그가 너무 궁금하지 않을 만큼 가끔 최 사장이라든가 사장님이라든가 불러주고, 불러준 것만큼 그를 경멸해줌으로써 비겼다고 생각하려 들었다. — [박완서] 나목 (세계사, 2012)
1953년 4월, 미군PX에 근무하며 만난 토목기사 호영진과 결혼한다. 시어머니 한 분과 함께 충신동 종로 5가의 조그만 한옥에서 신접살림을 꾸린다. ○ 딸 호원숙의 회고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62번지의 1. 18평짜리 한옥은 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사시던 집인데 아버지가 측량기사로 토목 공사에 따라다닐 때 받은 월급을 모아 샀다고 했다. 작은 집이었지만 지내기에는 무난하였다. 종로 5가에서 동숭동 쪽으로 효제국민학교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낙산 밑이었다. 낙산엔 산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들어차있었고, 무너질 듯이 지어진 무허가 판잣집들에 비해 작은 기와집은 대궐 같았는데 ㄷ자 형의 전형적인 서울집으로 화초담까지 있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1961년까지 살았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딸 넷을 낳으셨다. — [호원숙] 행 복한 예술가의 초상(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2) [B] 나중에 남편이 된 그이를 만난 것도 피엑스에서였다. 얼굴을 익히고 마주치면 꾸벅 머리라도 숙여 보인 것은 피엑스에 취직하고 나서 얼마 안 되고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피엑스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 빼놓고는 다 사람으로도 안 볼 때였으니까, 관심권 밖의 인물이었다. 안면이 있다 뿐 그 안에서 뭘 해서 월급 받는 사람인지 모르고 반년이 넘어 지났다. 그이도 평범한 피엑스 직원인데 그가 일하는 사무실은 피엑스 문밖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숙부가 피엑스까지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남대문시장에 왔다가 고향 어른을 만났는데, 조카딸이 피엑스 다닌다고 했더니 부득부득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졸라서 같이 온 거였다. 보나마나 취직 부탁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찾아와 취직할 길이 없겠느냐고 물어보는 수가 간혹 있었고, 티나 김을 통해 성사를 시켜 준 일도 딱 한 번 있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취직할 때의 절박했던 사정을 잊을 수 없어서 안 떨어지는 말을 억지로 해 본 게, 되긴 됐어도 한 달도 안 다니고 그만두었다. 미제 물건 쪽이었지만 다행히 블랙마켓 하다 들킨 건 아니고 적응이 안 돼 제 발로 걸어 나간 거였다. 그래도 안 시켜 주니만 못한 취직이었다. 나는 그만한 직장을 떨치고 나갈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고, 내가 어떤 곳에서 일한다는 게 그 친구를 통해 동창들 사이에 퍼질 것이 두려웠다. 사건이랄 것도 없는 그 일은, 그런 부탁에는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그런 힘이 없다고 밝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숙부가 고향 어른을 모시고 온 경우는 좀 달랐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어른 대접과 미련을 안 갖도록 하는 거절의 조화는 어린 나로서는 난감한 과제였다. 그것 자체가 벌써 미적거리는 빌미가 됐다. 직원 출입문인 뒷문밖은 조용한 얘기를 할 만하지 않은 북적거리는 뒷골목인 데다가, 그날은 하필 업자가 불하 맡은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날이었다. 피엑스에서는 쓰레기까지 입찰을 받아 최고가로 팔아먹었다. 박스가 주主인 쓰레기는 부피가 많아 실어 나르는 데 한참 걸릴 것 같았고, 거치적대고 있다는 걸 의식하니까 더욱 말이 잘 안 됐다. 마침 그때 그이 눈에 띄었다. 노인네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안돼 보였던지, 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얘기를 하라고 했다. 보아하니 노무자 주젠데 방이 따로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피엑스 안이 어디라고 패스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들어오라는 걸까. 그건 티나 김도 못 하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고 지하로 통하는 길은 경비실 밖에 있어서 밖에서 아무나 들락거리게 돼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이라기보다 작업실이라고 해야 알맞은, 각종 연장과 설계 도면 같은 게 비치된 살벌한 데였다. 바로 옆이 기관실이어서 굵고 가는 각종 파이프가 괴물스럽게 얽혀 있었고, 시커먼 석탄 더미가 쌓인 보일러실도 보였다. 피엑스 내부와는 딴판의 더럽고 우중충한 고장庫藏이었지만, 호감을 가질래서 그랬던지 남성적이고 정직한 활기가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엄마가 이렇게 한창 신이 나 있을 때 나는 엄마한테 피엑스를 그만두고 결혼할 뜻을 밝혔다. 그이로부터 결혼 신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암, 미군 부대는 그만둬야지. 이제 에미까지 하숙 쳐서 돈을 벌 텐데 네가 그 숭악하고 볼썽사나운 데를 뭣 하러 더 다니냐. 그만둬야 하구 말구. 근데 그만두고 뭘 하겠다구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라 시집을 가겠다구” 엄마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그럼, 엄마가 하숙 칠 생각을 한 건 내 대학 공부를 계속 시키고자였을까 능히 그럴 수 있는 엄마였다. 대학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너 같은 애가 뭣 하러 시집가서 애 낳고 밥하고 빨래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너는 보통 애하고 다르다. 공부 많이 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애야. 다 너 좋으라고 이러지, 네 덕 보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엄마는 태도를 바꾸어 차근차근 애원하는 투로 나왔다. 엄마의 그런 태도가 되레 흔들리던 내 마음을 경직시켰다. 엄마는 도대체 내가 무엇이 되길 바라고 저러는 걸까. 쌓이고 쌓인 게 많은 엄마가 측은했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돌파구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나는 내가 보통 아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꿈을 깨야 했다. 나는 우리 엄마의 보통 부모하고는 질이 다른, 집요한 공부 욕심이 싫었다. 차라리 지금 실망시키고 놓여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아뇨, 아무리 그러셔도 제 마음은 안 변해요. 전 결혼할 거예요. 공부를 계속하고 말고는 시집가서 결정할 수도 있어요. 그건 제 문제예요.” “누가 널 공부시켜 준대, 응 어떤 놈이 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꾀 그리고 그걸 믿냐, 믿길. 눈이 멀어도 분수가 있지.” 엄마가 몸을 떨며 때릴 듯이 덤벼들었다. “꾀긴 누가 꾄다고 그러셔요. 대학 같은 건 얘기도 안 했어요. 저한테는 이제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요. 가게 돼도 그만, 못 가게 돼도 그만이란 말예요.” “시집은 꼭 가야 되구 내가 널 어떻게 길렀다구.” “엄마는 어떻게 기른 것만 그렇게 중요하구, 그렇게 기른 자식이 어디로 시집을 가고 싶어 하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제야 엄마는 마지못해 누구냐고 물었다. 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거였다. 그이 이름을 댔을 때 엄마는 온몸으로 분노와 경멸을 나타내며 말했다. “뭐라구 그 좋은 학교 그만두고 시집가겠다는 데가 겨우 노가다 십장이라구 집안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엄마가 그이를 노가다 십장이라고 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이가 토목과 나온 걸 처음 들었을 때의 즉각적인 반응도 그 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어떤 욕을 해도 들을 각오가 돼 있었다. 엄마의 소원은 못 들어주는 대신 분풀이만은 다 풀릴 때까지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그 자리에서 체념해 버린 것 같았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담벼락처럼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읽어 내는 데는 뭐 있었다. 나에게 안 드러내려고 기를 쓰는 엄마의 체념이 슬펐다. 엄마가 노가다 십장 다음으로 그이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은 건 그이의 성씨였다. 그이는 흔해 빠진 이가, 김가, 박가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한 번 들으면 어, 우리나라에 그런 성도 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드문 벽성僻姓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성 가진 이가 벼슬한 예는 만고에 없으니 분명히 상놈일 거라고 했다. 양반은 물론 당파까지 따져서 노론 집안이 아니면 혼사를 튼 일도 없다는 게 엄마의 가문 자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양반 타령은 노가다 십장보다 더 겁나지 않았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B] 그때로서는 제일 큰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떡 벌어지게 피로연을 했기 때문에, 우리 친척들은 다들 내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는 줄 알고 부러워했다. 돈 한 푼 안 내고 대부대를 이끌고 피로연에 참석한 엄마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마치 먹어 주러 온 것만 고마워하라는 투였다. 전에 엄마로부터 들은 바로는, 양반은 없으면 허리춤에 빗만 찌르고 시집을 갈지언정 사돈집에서 돈이나 물건을 받아 혼수를 장만하는 법은 없다, 그런 천격스러운 짓은 중인이나 상것들이 하는 짓이다,라고 했는데 엄마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도대체 어느 계층의 풍속이란 말인가. 아마 생살을 찢어 내는 의식일 터였다. 피로연 끝엔 시집에 가서 활옷 입고 족두리 쓰고 폐백드리고 나서 큰상을 받았다. 방석을 몇 개씩 고이고 앉아야 마당에 선 구경꾼에게 얼굴을 내밀 수 있도록 높게 굄질을 한 화려한 큰상이었다. 첫날밤은 친정에서 치르기를 바라는 시집 쪽 눈치를 보기가 싫어서 좀 번거롭지만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직도 민간인이 한강을 편안하게 건너려면 도강증 등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하고, 갈 만한 데도 마땅치 않을 때였다. 인천에서 하룻밤을 자고 와서, 시집에서 아침저녁 문안드리고 부엌에는 안 나가는 삼일을 또 치렀다. 그러고 나서 친정에 보내 주면서 시어머니가 기어코 뼈아픈 소리를 한마디했다. 원은 큰상을 그대로 사돈댁에 보내는 건데 그러면 그만큼 너희 집에서도 해 보내야 된다, 보아하니 너희 친정 형편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를 않아 빈손으로 보내는 거니, 어머니 걱정하시지 않게 당일로 빈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멸시 안 당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멸시를 멸시로 느끼지 않는 거였다. 빈손으로 보낸다고 하면서도 떡과 고기와 술을 싸 주었다. 신랑은 그날부터 출근을 해야 된다고 해서 데려다만 주고 저녁때 데리러 오기로 했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필로그(웅진씽크빅, 2005)
납북되었던 오빠가 1.4후퇴 직전 관통상을 입어 돌아온다. 어머니와 오빠는 현저동에 남고 “임진강만 건너지 말자” 약속하며 박완서와 올케는 교하로 피난을 간다. 미군의 서울 수복 후 상봉한 박완서와 가족들은 돈암동 집으로 귀가한다. 빨갱이로 오해 받아 붙잡혀 간 숙부는 사형 당하고, 1951년 7월, 오빠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는지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B] 오밤중인지 새벽인지 분명치 않았다. 한잠을 자고 일어났는지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멀다는 거리감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아득한 원시로 느껴질 만큼 그 비명은 간략하게 절제돼 있어 사람의 소리 같지가 않았다. 올케의 나부끼는 허연 속곳 가랑이를 보면서 나도 비로소 소름이 쫙 끼쳤다. 엄마가 말을 잃은 외마디소리로 우릴 부르고 있었다. 오빠는 죽어 있었다. 복중의 주검도 차가웠다. 그때가 몇 시인지 우리는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고 왜 엄마 혼자서 임종을 지켰는지도 묻지 않았다. 엄마도 자다가 옆에서 끼쳐 오는 싸늘한 냉기 때문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체온 외엔 오빠가 살아 있을 때하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 똑바로 뜨고 지키고 앉았었다고 해도 아무도 그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 맞은 지 팔 개월 만이었고, ‘거기’ 다녀온 지 닷새 만이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팔 개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의 임종을 못 본 걸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너무도 긴 사라짐의 과정을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곡을 할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린 미리 상갓집에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의 시간관념도 없었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B] 처음부터 경찰로 붙들려 간 숙부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 사실을 출옥하는 사람 편에 숙부가 보낸 편지를 통해 알았을 정도로 우리는 숙부에게 옥바라지도 제대로 할 형편이 못 됐다. 숙부의 편지는 내가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라도 대서 나를 좀 살려 달라는 거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힘이나 백이 돼 줄 만한 친척이 그렇게도 없었던지 우리 집안이 무 밑동 잘라 놓은 것처럼 고적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라는 걸 그때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다. 부역한 죄수가 하도 많을 때라 솜옷 한 번 차입하는 데도 온종일이 걸렸다. 마침 오래 형무관 생활을 한 친척이 있어 그 정도의 편의는 봐주길 기대하고 청을 해 봤는데 어림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말단 공무원이 부역자하고 상종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도 치가 떨리게 야속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른 새벽에 줄을 서려고 엄마는 예전에 현저동에서 각별하게 지내던 집을 다 찾아가 염치없이 하룻밤을 드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따뜻한 위로와 대접을 받았다며 없는 사람이 훨씬 인정스럽더라고 했다. 그나마의 옥바라지나마 못 하게 된 사이에 숙부는 처형을 당했다. 실은 언제 처형을 당했는지 그 날짜도 모른다. 숙부의 편지 한 장 외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사형을 집행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란 통고 같은 것도 물론 받은 바 없다. 사형을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지만, 곧 일사후퇴가 있었고, 그 후 숙부의 존재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후퇴 전의 제반 상황으로 미루어 집단적으로 처형됐을 것이다. 빨갱이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