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1953년 4월, 미군PX에 근무하며 만난 토목기사 호영진과 결혼한다. 시어머니 한 분과 함께 충신동 종로 5가의 조그만 한옥에서 신접살림을 꾸린다. ○ 딸 호원숙의 회고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62번지의 1. 18평짜리 한옥은 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사시던 집인데 아버지가 측량기사로 토목 공사에 따라다닐 때 받은 월급을 모아 샀다고 했다. 작은 집이었지만 지내기에는 무난하였다. 종로 5가에서 동숭동 쪽으로 효제국민학교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낙산 밑이었다. 낙산엔 산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들어차있었고, 무너질 듯이 지어진 무허가 판잣집들에 비해 작은 기와집은 대궐 같았는데 ㄷ자 형의 전형적인 서울집으로 화초담까지 있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1961년까지 살았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딸 넷을 낳으셨다. — [호원숙] 행 복한 예술가의 초상(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2) [B] 나중에 남편이 된 그이를 만난 것도 피엑스에서였다. 얼굴을 익히고 마주치면 꾸벅 머리라도 숙여 보인 것은 피엑스에 취직하고 나서 얼마 안 되고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피엑스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 빼놓고는 다 사람으로도 안 볼 때였으니까, 관심권 밖의 인물이었다. 안면이 있다 뿐 그 안에서 뭘 해서 월급 받는 사람인지 모르고 반년이 넘어 지났다. 그이도 평범한 피엑스 직원인데 그가 일하는 사무실은 피엑스 문밖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숙부가 피엑스까지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남대문시장에 왔다가 고향 어른을 만났는데, 조카딸이 피엑스 다닌다고 했더니 부득부득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졸라서 같이 온 거였다. 보나마나 취직 부탁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찾아와 취직할 길이 없겠느냐고 물어보는 수가 간혹 있었고, 티나 김을 통해 성사를 시켜 준 일도 딱 한 번 있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취직할 때의 절박했던 사정을 잊을 수 없어서 안 떨어지는 말을 억지로 해 본 게, 되긴 됐어도 한 달도 안 다니고 그만두었다. 미제 물건 쪽이었지만 다행히 블랙마켓 하다 들킨 건 아니고 적응이 안 돼 제 발로 걸어 나간 거였다. 그래도 안 시켜 주니만 못한 취직이었다. 나는 그만한 직장을 떨치고 나갈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고, 내가 어떤 곳에서 일한다는 게 그 친구를 통해 동창들 사이에 퍼질 것이 두려웠다. 사건이랄 것도 없는 그 일은, 그런 부탁에는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그런 힘이 없다고 밝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숙부가 고향 어른을 모시고 온 경우는 좀 달랐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어른 대접과 미련을 안 갖도록 하는 거절의 조화는 어린 나로서는 난감한 과제였다. 그것 자체가 벌써 미적거리는 빌미가 됐다. 직원 출입문인 뒷문밖은 조용한 얘기를 할 만하지 않은 북적거리는 뒷골목인 데다가, 그날은 하필 업자가 불하 맡은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날이었다. 피엑스에서는 쓰레기까지 입찰을 받아 최고가로 팔아먹었다. 박스가 주主인 쓰레기는 부피가 많아 실어 나르는 데 한참 걸릴 것 같았고, 거치적대고 있다는 걸 의식하니까 더욱 말이 잘 안 됐다. 마침 그때 그이 눈에 띄었다. 노인네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안돼 보였던지, 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얘기를 하라고 했다. 보아하니 노무자 주젠데 방이 따로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피엑스 안이 어디라고 패스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들어오라는 걸까. 그건 티나 김도 못 하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고 지하로 통하는 길은 경비실 밖에 있어서 밖에서 아무나 들락거리게 돼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이라기보다 작업실이라고 해야 알맞은, 각종 연장과 설계 도면 같은 게 비치된 살벌한 데였다. 바로 옆이 기관실이어서 굵고 가는 각종 파이프가 괴물스럽게 얽혀 있었고, 시커먼 석탄 더미가 쌓인 보일러실도 보였다. 피엑스 내부와는 딴판의 더럽고 우중충한 고장庫藏이었지만, 호감을 가질래서 그랬던지 남성적이고 정직한 활기가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엄마가 이렇게 한창 신이 나 있을 때 나는 엄마한테 피엑스를 그만두고 결혼할 뜻을 밝혔다. 그이로부터 결혼 신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암, 미군 부대는 그만둬야지. 이제 에미까지 하숙 쳐서 돈을 벌 텐데 네가 그 숭악하고 볼썽사나운 데를 뭣 하러 더 다니냐. 그만둬야 하구 말구. 근데 그만두고 뭘 하겠다구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라 시집을 가겠다구” 엄마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그럼, 엄마가 하숙 칠 생각을 한 건 내 대학 공부를 계속 시키고자였을까 능히 그럴 수 있는 엄마였다. 대학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너 같은 애가 뭣 하러 시집가서 애 낳고 밥하고 빨래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너는 보통 애하고 다르다. 공부 많이 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애야. 다 너 좋으라고 이러지, 네 덕 보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엄마는 태도를 바꾸어 차근차근 애원하는 투로 나왔다. 엄마의 그런 태도가 되레 흔들리던 내 마음을 경직시켰다. 엄마는 도대체 내가 무엇이 되길 바라고 저러는 걸까. 쌓이고 쌓인 게 많은 엄마가 측은했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돌파구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나는 내가 보통 아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꿈을 깨야 했다. 나는 우리 엄마의 보통 부모하고는 질이 다른, 집요한 공부 욕심이 싫었다. 차라리 지금 실망시키고 놓여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아뇨, 아무리 그러셔도 제 마음은 안 변해요. 전 결혼할 거예요. 공부를 계속하고 말고는 시집가서 결정할 수도 있어요. 그건 제 문제예요.” “누가 널 공부시켜 준대, 응 어떤 놈이 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꾀 그리고 그걸 믿냐, 믿길. 눈이 멀어도 분수가 있지.” 엄마가 몸을 떨며 때릴 듯이 덤벼들었다. “꾀긴 누가 꾄다고 그러셔요. 대학 같은 건 얘기도 안 했어요. 저한테는 이제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요. 가게 돼도 그만, 못 가게 돼도 그만이란 말예요.” “시집은 꼭 가야 되구 내가 널 어떻게 길렀다구.” “엄마는 어떻게 기른 것만 그렇게 중요하구, 그렇게 기른 자식이 어디로 시집을 가고 싶어 하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제야 엄마는 마지못해 누구냐고 물었다. 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거였다. 그이 이름을 댔을 때 엄마는 온몸으로 분노와 경멸을 나타내며 말했다. “뭐라구 그 좋은 학교 그만두고 시집가겠다는 데가 겨우 노가다 십장이라구 집안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엄마가 그이를 노가다 십장이라고 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이가 토목과 나온 걸 처음 들었을 때의 즉각적인 반응도 그 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어떤 욕을 해도 들을 각오가 돼 있었다. 엄마의 소원은 못 들어주는 대신 분풀이만은 다 풀릴 때까지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그 자리에서 체념해 버린 것 같았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담벼락처럼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읽어 내는 데는 뭐 있었다. 나에게 안 드러내려고 기를 쓰는 엄마의 체념이 슬펐다. 엄마가 노가다 십장 다음으로 그이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은 건 그이의 성씨였다. 그이는 흔해 빠진 이가, 김가, 박가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한 번 들으면 어, 우리나라에 그런 성도 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드문 벽성僻姓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성 가진 이가 벼슬한 예는 만고에 없으니 분명히 상놈일 거라고 했다. 양반은 물론 당파까지 따져서 노론 집안이 아니면 혼사를 튼 일도 없다는 게 엄마의 가문 자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양반 타령은 노가다 십장보다 더 겁나지 않았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씽크빅, 2005) [B] 그때로서는 제일 큰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떡 벌어지게 피로연을 했기 때문에, 우리 친척들은 다들 내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는 줄 알고 부러워했다. 돈 한 푼 안 내고 대부대를 이끌고 피로연에 참석한 엄마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마치 먹어 주러 온 것만 고마워하라는 투였다. 전에 엄마로부터 들은 바로는, 양반은 없으면 허리춤에 빗만 찌르고 시집을 갈지언정 사돈집에서 돈이나 물건을 받아 혼수를 장만하는 법은 없다, 그런 천격스러운 짓은 중인이나 상것들이 하는 짓이다,라고 했는데 엄마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도대체 어느 계층의 풍속이란 말인가. 아마 생살을 찢어 내는 의식일 터였다. 피로연 끝엔 시집에 가서 활옷 입고 족두리 쓰고 폐백드리고 나서 큰상을 받았다. 방석을 몇 개씩 고이고 앉아야 마당에 선 구경꾼에게 얼굴을 내밀 수 있도록 높게 굄질을 한 화려한 큰상이었다. 첫날밤은 친정에서 치르기를 바라는 시집 쪽 눈치를 보기가 싫어서 좀 번거롭지만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직도 민간인이 한강을 편안하게 건너려면 도강증 등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하고, 갈 만한 데도 마땅치 않을 때였다. 인천에서 하룻밤을 자고 와서, 시집에서 아침저녁 문안드리고 부엌에는 안 나가는 삼일을 또 치렀다. 그러고 나서 친정에 보내 주면서 시어머니가 기어코 뼈아픈 소리를 한마디했다. 원은 큰상을 그대로 사돈댁에 보내는 건데 그러면 그만큼 너희 집에서도 해 보내야 된다, 보아하니 너희 친정 형편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를 않아 빈손으로 보내는 거니, 어머니 걱정하시지 않게 당일로 빈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멸시 안 당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멸시를 멸시로 느끼지 않는 거였다. 빈손으로 보낸다고 하면서도 떡과 고기와 술을 싸 주었다. 신랑은 그날부터 출근을 해야 된다고 해서 데려다만 주고 저녁때 데리러 오기로 했다. — [박완서]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필로그(웅진씽크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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