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법정동이다. 지금의 미아리고개를 조선시대 야인(되놈)들이 동소문을 이용하여 도성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 부르고, 이를 한자명으로 돈암현이라고 한 데서 '돈암동(敦岩洞)'이라는 동명이 유래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였다가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따라 경성부를 확장하면서 이 동을 경성부에 재편입시켜 돈암정이란 일제식 동명을 붙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돈암동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당시 돈암동이란 법정동명은 동소문 밖에서 미아리고개까지 일대를 일컫던 대표적 지명으로 그 구역이 매우 넓었다. 1949년 8월 15일 정부가 대통령령 제159호로 성북구를 신설함으로써 돈암동이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넓은 구역이 분동되어 현재는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산록 대부분 지역만이 돈암동이 되었다. 따라서 박완서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지역은 현재 서울 성북구 삼선동 일대인 셈이다. ○ 6.25 전까지 돈암동에서만 세번의 이사를 다니다. — 오빠의 좌익운동이 발각될까 신문로에서 돈암동으로 이사했지만, 돈암동 집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거의 일 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 돈암동에서 수송동에 있는 숙명여고까지 걸어서 통학하다. — 전차는 줄도 길고 배차간격도 길어 기다리다간 지각하기 십상이었다. 꼭 사십오 분 걸려 그 거리를 걸어다녔다. ○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 『목마른 계절』에서 '하진'의 집은 돈암동에 위치한 것으로 나오는데, 한국전쟁기 돈암동은 현재의 돈암동,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박완서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지역을 염두에 두었을 때, '하진'의 돈암동 집은 현재의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 어머니 '서 여사'는 아들 하열이 돌아오지 않아 피난을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임신한 며느리 '혜순'을 피신시킬 것을 '하진'에게 권한다. — '현민'과 '하진'의 집은 모두 서울 성북구 돈암동 쪽에 있어 두 인물은 'S대' 교문을 지나 함께 하교한다. 헤어진 후 '하진'은 걷다가 '민준식'을 만나고, '하진'의 자서전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 '혜순'의 출산이 임박해 오고, 9월로 접어들면서 폭격이 심해지자 '하진'은 억척스럽게 생활을 주도하며 '혜순'의 출산에 대비한다. ○ 장편소설 『도시의 흉년』 —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한 박완서 가족은 인민군 치하에서 이곳 돈암동에 머물며 생존했다. 『도시의 흉년』의 주무대인 수연의 양옥집이 이곳에 있다. ○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1·4후퇴 이전에 살던 돈암동 집은 성북경찰서가 있는 천변을 걷다가 보이는 신안탕(목욕탕) 뒤편 골목에 있다. — '나'와 '근숙'이 운영하던 다과점이 폐업하는 날 다른 식구들이 천안에서 돌아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가 세상을 떠난다. 오빠의 시신을 미아리고개 너머 농가 뒤쪽의 밭머리에 매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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